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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9 [서창나루와 농선대시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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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6-25 조회수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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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9
서창나루와 농선대시주비

■서창나루에서 배를 타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이용해야 한다. 강폭이 좁은 곳에는 다리가
있기도 하지만 큰비만 오면 무너지곤 해서 다시 만들기 전에는
건널 수 없다. 여름에는 배를 타고 건너고 겨울에는 다리를
이용하는 게 늘 반복되곤 했다.
나루에는 여러 종류의 배가 있다. 고기를 잡는 어선이 있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조선, 인근의 광산에서 캔 돌들을 나르는
광선, 군사들이 타는 병선 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 배나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산강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나루터가
있으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농사 때문에
농부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곤 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 강
건너편으로 건너야 할 농부들이 있는가 하면 벼나 곡식을 수확
하면 이를 실어 나를 배를 타야 했다.
이처럼 마을과 강 너머의 농토를 오갈 때 사용된 배를 농선(農船)
이라 한다. 돛을 달지 않고 갑판도 없는 무동력의 작은 거룻배
이다. 주로 농토로 건너갈 때 사람과 농기구를 싣고 수확기에는
볏단을 실어내던 쪽배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이 타고 강을 건너는 배는 따로 있다. 그리
크지도 않았다. 좀 큰 거루는 사람 10여명이 타면 만선이 되지만
작은 거루는 너댓명이 타면 그만이었다. 해온이도 이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해온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나루를 찾았다. 광주에서 인근
나주나 장성 등지로 건너는 나루터는 몇 곳이 있다. 산강의
덕흥동과 월곡동을 잇는 덕흥나루와 황룡강 쪽으로는 송정
취수보 인근의 선암나루, 장성 북쪽을 연결시켜주는 용두동의
거진나루 등을 들 수 있다.

광주와 나주를 연결하는 나루는 두 곳이 있었다. 서창나루와
벽진나루이다. 서창동과 광주공항 뒤편의 서창평야를 연결하는
나루이다. 해온이도 이 나루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 했다.
농부들을 따라 강을 건너가 농사를 거들고 싶었다.
아, 지금은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나루를 이용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 나루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 뜻에서 ‘서창나루’라는
표지만 세워놓았다. 지금의 서창교에서 아래에 있다. 나주에서
광주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나루를 이용했다고
들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극락진(極樂津)이라 했던 나루가 바로 이
서창나루를 말한다.
산강과 황룡강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극락진은 현재
광주~송정리를 잇는 도로인 광송도로가 지나는 ‘극락교’라는
다리 때문에 극락교 자리에 극락진이 있었을 것이란 혼동을
일으킨다. 그곳은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벽진나루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왜 극락진이라 불을까. 해온이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극락원(極樂院)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극락원은 그 명칭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짙게 풍긴다. 이는 초기 원(院)의 기능이 불교도들의 순례와
관련이 깊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낳게 한다.
하지만 통상 원은 당시 행정 관리들이 업무상 다니는 주요 길목에
설치했던 숙소이다. 이곳에서 잠을 자지만 식사를 하고 때로는
말도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는
경우가 많아 승려들이 관리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
역할을 하곤 했다. 당연히 서창나루가 있는 극락원은 장이
들어설 수밖에 없는 위치다.
조선시대 들어 1392년(태조 1) 9월에 문하좌시중 배극렴(裵克
廉)과 우시중 조준(趙浚)의 상소로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을
보수하고 짓기도 했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인이나 좌판상과 같은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극락원은 이후에도 이 일대의 지명에 많은 향을 주었다.
불교숭상국가던 고려시대의 향을 받아 극락원이 있어
극락진이라 했다. 광주 사람들은 이 일대를 지금도 극락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극락강이라는 공식 명칭은 지도에는 없다.
지금도 광주-송정간 잇는 큰 다리를 극락교라고 부르며 강변에
있는 철도역을 극락강역이라 하는 것이다.

■ 유배객 노수신이 광주를 찾다
서창나루가 물길을 따라 나주와 연결되기도 했다. 이는 1555년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극락진에 당도했다는 기록
에서 알 수 있다. 해온이는 노수신의 행적을 뒤따라가 보기로
했다.
노수신은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던 해에 사림들이 피해를 당한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로 달리면
326킬로미터 쯤 된다. 자동차로 달려도 4시간 반 쯤 걸린다.
그런데 그 옛날에 말을 타거나 걸었더라면 옛길을 따라 걸으면
400킬로미터를 훨씬 넘었을 것 같다. 정말 몇날 며칠을 힘들어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
書事件)에 연루된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정미사화
라고도 말한다. 노수신은 다시 순천에서 156킬로미터가 떨어진
서남해안의 끄트머리인 진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몇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차에 뜻하지 않던 사건을 만난다. 8
년 뒤인 1555년에 왜구가 서남해안을 침략해 노략질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인근에 있는 해남에서 달량진사변으로 일컫는
을묘왜변이 일어난다. 달량진은 현재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다. 남창리와 완도군 달도(達島) 사이의 물목에 설치
되었던 조선시대의 수군진이다.
전쟁인 탓에 유배객인 노수신도 진도에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저 단순하게 허둥대며 줄행랑은 아니다. 여유롭지만은
않았겠지만 관조한다. 그리고 문학작품을 빌어 기록으로 남긴다.
노수신의 피난길은 1555년 5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진도 소포(素浦)를 떠났다가 해남, 목포, 무안,
함평, 나주, 광주, 담양, 순창까지 갔다가 다시 광주를 거쳐 암,
강진, 벽파진을 거쳐 진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남해안의
바닷길과 내륙수로인 산강을 잇는 길이다. 이 여정이 노수신의 문집인 권4 ‘을묘피구록(
乙卯避寇錄)’에 실려 있다. 마흔 일곱수의 시(詩)로 기록한 왜구
피난 기록이다. 소재는 그 다급한 피난길에도 들리는 곳마다
경관 풍물을 벗 삼아 만나는 사람마다 인연을 내세워 시를 기록
으로 남긴다.
시란 분명 형상화 된 문학작품이지만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문화도 읽힌다. 노수신은 시의 제목 다음에 주석을 적었다. 날짜와
날씨, 그리고 만난 사람과 들린 곳과 인연 등 전후 사정을 기록했다.
21번째 시에 ‘광주에 도착하여(次光州城下)’에 보면 초입일
맑거나 비가 오다. 금성을 출발하여 극락진을 건넜고 비가 내리다.
광주읍성 바닥을 헤쳐 나가다. 동생인 무회(노극신)를 만나 술을
마시다(初入日 晴或雨 發錦城渡極樂津 驟雨 抵光城底 無悔出會
飮酒同被)고 적고 있다.

분명 노수신은 6월 1일 쯤 극락진을 지나 광주로 간 길이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진도 유배지에서 광주까지 가는 길이 17일
가량 걸린 것으로 보인다.
노수신은 광주를 찾아 무회와 회포를 나누었다. 어디에서 회포를
풀었을까. 해온이가 따라가보니 두 사람의 회포를 푼 장소가 2층
누각인 증심사 취백루(翠栢樓)다. 무등산 자락이 훤히 보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가야금 소리 같아 술이 술술 넘어갔다.
그리고 광주를 지나 담양, 순창을 거쳤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길에
노수신은 한 여름철, 광주목 읍성 안에서 머물다. 그러다가 음력
6월 25일 맑은 날, 무등산의 증심사를 찾는다. 노수신은 동생
무회와 밤새껏 토론한다.
해온이는 귀를 쫑긋 기울여 들었다. 두 사람간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이질 않았다. 선문 선답이었을까? 유배 와중이었으니
세상사도 논했을 법하다. 왜구를 피했던 길[피구길]이었으니 시절
이야기도 말했을 법하다.
이처럼 소재는 증심사에서 조선 스님과 며칠 밤을 지샜고,
헤어지면서 스님에게 시를 지어준다.
‘증심사 조선스님에게 주다(證心寺 贈祖禪)’라는 시를 보면
주석으로 남긴 기록에 25일 날씨 맑음. [광주]성안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절을 찾아 무회와 밤을 지새다.(二十五日 晴 不使久於城 乃
尋寺 無悔同宿)라고 했다.
■ 극락진 거쳐 광주 가는 길목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1834~?)도 나주를 거쳐 광주를 오갈 때
이 나루를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송정광주간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 나주쪽 사람들은 광산 송대동 송정나루에서 서창나루를 건너
금호운리풍암 노인고개를 통해 광주읍으로 향했다.
서창면은 광주 서남부 들목 길목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운리에는
금정(金亭) 주막이 있었고 옹기가마도 있어서 작은 장이 서기도
했다. 지도군수 오횡묵이 쓴 에도 나오는 주막
이름이다. 금정은 마을 사람들은 쇠정이라고 부르곤 했다. 운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큰길가에 버드나무 정자가 있기도 해
사람들이 고개를 넘을 때면 한숨 쉬어가기도 했다. 그래서 주막이
있었다.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 집하장인 나주의 산창까지
세곡을 운송했다. 산창은 나주와 광주 이남의 모든 전세 납세를
운반해 보관했던 곳이다. 그 출항지가 바로 지금의 서창동 산4
번지에 있었던 서창(西倉)이었다. 말 그대로 광주의 서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를 끼고 번창하던 포구 마을이었다.
서창이 이곳에 설치된 것은 산강을 따라 조운에 편리했고 나루가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광주 관아에서 운하는 세곡 보관창고인
서창도 있었다. 창고가 있던 언덕을 주민들은 ‘창등’이라 부른다. 세
뜸으로 이루어진 서창마을 중 이곳만을 지칭할 때 ‘창촌’이라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본래 극락진이라 했던 이곳이 점차 서창나루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창이 이곳에 설치된 것은 조운에 유리한 조건, 즉
산강과 이웃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창고가 강변에 있는
데다가 산창과 서창 사이에 배가 왕래했기 때문에 ‘서창’
이라는 창고 이름이 점차 사람들 사이에 입에 올랐다. 극락진
이라는 이름이 점차로 서창으로 바뀌어갔다.
16세기에 세곡의 중간 집하장이 산창에서 광의 법성창으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서창은 세곡을 갈무리하는 나루로서
여전히 중요했다. 당연히 이곳의 창고지기인 서창색(西倉色)도
가욋돈을 벌 수 있는 ‘목 좋은 자리’로 통했다.
서창색의 채용 때는 늘 뒷거래가 많았는데, 1874년(고종 11)
광주를 다녀간 암행어사 여규익(呂奎益)이 낸 ‘서계(書啓)’를
보면 당시 서창색의 자릿값이 200냥이나 됐다고 한다. 이만한
거금을 내고서라도 서로 욕심을 내던, 꽤 쏠쏠한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서창이 번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서창나루가 산강 하류지역과 뱃길을 연결하는 포구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많지 않다. 대체로 현존하는 기록이나 구전은
서창이 나루터음을 더 보여준다. 서창엔 세곡이나 물건들만
모여드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도 붐볐다.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나루는 현재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산구 평동 일대인
나주 북문거리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나루를 이용했던 탓에 배로는 그들을 다 실어
나르기 어려웠다. 또 강물이 줄어드는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아예
배 젓는 일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그 때문에 이곳엔 다리가 놓다. 물론 지금의 서창교처럼
시멘트를 부어 만든 짱짱한 다리는 아니었다. 다리는 강물이
줄어든 시기에 섶나무와 흙으로 얼기설기 이어 만들어 마치
제비집 같았다. 한여름이면 폭우 때 무너지기는 다반사다.
그래서 뜯고 짓기를 되풀이했다.
물과 뭍이 만나고 사람들이 뒤엉키는 포구라면 어김없이 시장이
서는 법일까. 이곳에도 예전엔 꽤 큰 장이 섰다. 1770년의 에는 서창장의 장날이 5일과 10일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광주 읍내 사람들이 소금이나 어물을 사려면 대개 이곳에
와서 장을 봤다고 한다.
산강은 수심 등으로 인해 배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최종적으로
접안할 수 있는 종점, 즉 가항종점은 차이가 있었다. 20세기 초엽을
기준으로 소형 증기선이나 석유발동선은 대체로 산포까지
소강했다.
대개 선체의 중량만 20~30톤에 달하는 이들 동력선은 빈 배인
경우라도 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인 홀수(喫水)가 깊어 일정한 수심
이하로는 항해와 접안이 곤란했다. 반면에 먼 바다를 오갈 정도의
비교적 큰 범선이나 전래의 우리 배인 한선은 산포에서 1.5km
북쪽인 노항포(路項浦)까지는 그럭저럭 올라왔다.
노항포는 강이 크게 굽이도는 곳에 있었다. 긴 물굽이가 지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질목구비’라 불다. 이 말이 변해 ‘
진묵구부’로도 불렸다. 이 나루는 나주시 산포와 방목들 마을 사이에
있었다. 나주 송월리 토계촌과 연결되는 곳이다. 1910년대 산포
나무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주로 범선들이 정박했던 포구이다.
제주에서 온 말들이 육지로 팔려나가기 전에 배멀미를 풀 수 있는 들이
주변에 있어 지금도 이곳 주위를 ‘방목들’이라 부른다.
이곳 나루까지 갈 수 있는 배는 바닥이 평평해야 했다. 전래의 한선은
뱃바닥이 평평해 수십이 얕은 곳도 무난히 출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체 구조가 수심이 얕은 지형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배
자체의 중량 때문에 수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큰 돈 들여 농선을 시주하다
우리가 큰 배라고 부를 만한 정도의 배보다 아래의 거룻배나 뗏목만이
좀 더 내륙까지 출입이 가능했다. 그 최종 지점이 이곳 서창나루다.
조선시대의 자료에는 당시 서창마을에 법으로 나룻배 1척을
비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배는 5년에 한 번 꼴로 정기적으로 수리를
해야 했고 건조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에는 새로 나룻배를 짓도록
했다.
하지만 나룻배를 수리하고 건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 돈을 내야 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지어야 했다. 광주의
옛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목재 부족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그것을 고치고 새로 짓는데 필요한 굵고 긴 나무를
확보하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이 와중에 누군가 배를 쾌척했다면 이는
마을 사람들의 노고를 크게 덜어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해온이는 서창나루에 다니는 배를 누군가 쾌척했다고 하여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지금으로부터 260
년 전 일이다. 서창마을에 귀중한 배를 시주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다. 그들도 돈을 냈겠지만 두 사람이 나서서 농선을 만들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에 그 감사의 뜻을 담아 비석을 세웠다. 이는
강을 끼고 살았던 서창 주민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서창에 살던 강(姜) 아무개와 조(曹) 아무개이다. 오늘날 이
농선을 기부해 주민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한 데 따른 칭송비가
있다. 서창동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 있는 ‘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
碑)’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건륭(乾隆) 34년에 한량(閑良) 강선주(姜善周)와
통정(通政) 조창좌(曹昌佐)가 농선을 시주했다.”이다. 건륭 34년은
청나라 고종의 연호로 서기 1769년이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첫 특허를 받아낸 해이고,
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한 해이다. 또 뒷면 두 곳 가운데 한쪽에
화주(化主)의 거주지가 금부촌리(金夫村里)이며 성명 김순봉(金順
奉)이라고 적혀 있다. 이 때 화주는 직접 나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돈이나 물건을 걷어 모아 좋은 일에 사용할 때 책임지는 사람을 말한다.
앞면과 연대 표기면 사이의 옆면 한 곳은 서일중(徐日仲)이라는 시주
인명과 금액 3량(兩)이 적혀있다. 용어, 지명, 인명으로 보아 서창
나루를 이용하는 농선의 선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금부촌리는 조선시대 후기 광주 당부면(當夫面) 관할이었다. 1914
년에 금부(金夫)와 만호(晚湖)가 합해져 금호리가 되면서 서창면에
속하게 된다. 이 금호리가 뒷날 금호동이 된다. 나루 자체는 관창(官倉
, 광산 西倉)이 있었던 곳인지라 '세곡선'의 출입과 세곡의 저장 운송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선의 용도와는 구별해야 할 듯 싶다.
김희태는 이 비를 ‘농선의 선부가 시주를 해서 통정 조창좌와 한량
강선주 등이 세운 비’로 볼 것인지, 또 ‘농선의 선부를 위해서 세운
것인데 비 세우는데 통정과 한량 등이 시주한 비’로 볼 것인지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를 ‘농선부시주비(農船夫施主碑)’로 읽고 있다. 그런데
해온이가 유심히 이 비석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으로 볼 때는 대(大)
자가 마치 부(夫)자처럼 보다. 그런데 현장 비석을 다시 들여다보니
부(夫)자처럼 착각을 일으킬만 했다. 부(夫)자의 위 가로획 자리에
비석이 금이 간 것이다. 해온이는 크게 시주했다는 의미로 대(大)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 생압진과 벽진나루
광주~송정 간 신작로가 생기면서 극락교라는 다리가 놓여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쉽게 오갈 수 있지만 사월산이 있는 이 근방에는
벽진나루가 있었다. 극락교 밑에 있는 나루는 옛 문헌에서 벽진나루
또는 생압진(生鴨鎭)으로 소개된 나루이다.
벽진나루는 거진나루와 함께 광주의 대표적인 나루로 꼽는 곳이었다.
에도 올라 있는 이름이다. 광주의 향토사학자인
김경수 선생은 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무등산 사자가 건너와 살았다 하여 사월산(獅月山, 99m)
이라고 부른 산자락을 배산으로 삼고 편리한 수운 탓으로 고려 때 벽진부곡(碧津部曲)이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선도면(船道面)과 당부면(當夫面)으로 있다가 일제 때
서창면 소속의 벽진리가 되었다. 벽진은 본디 '배터' 란 뜻이
한자화되었고, 남쪽에도 배고랑 뜸이 있다. 월산마을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유물들도 발굴되었고,
상촌에는 옛 역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해온이는 벽진나루에 극락교가 만들어지고 신작로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조광철 광주시립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 초엽에 지금의 광산구 신촌동 일대에 전라병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방에 주둔하는 군단, 즉 병은 중국 당나라
이래로 내상(內廂)이라 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이런
관행을 따랐다. 에 광주 내상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인다.
그런데 광주에 있던 전라병이 강진으로 옮겨간다. 그 터를 일컬어
광주에서는 고내상(古內廂)이라 했다. 벽진은 광주시내와 전라
병을 연결하는 나룻목으로써 의미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벽진은 생압도(生鴨渡) 또는 생압진(生鴨津)으로도
불다. 이 때문에 언제부턴가 벽진을 생압진과 함께 기록하는 관행이
싹 텄다. 그럼에도 생압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작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논란은 차치하고 수많은 산강변 가운데 왜 하필 벽진은 사월산
아래에 있었을까? 우연일까? 사실 벽진은 주의 깊게 사월산을 나루터
장소로 택한 듯하다.
조광철은 사월산은 상류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산강이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공격사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런 곳은 수심이 깊고
일정하다. 어지간한 가뭄에도 배를 뭍에 가깝게 접안할 수 있다.

벽진은 이런 지형을 이용해 나룻배를 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맞은편은 지금 극락교의 교대(橋臺, 다리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가
있는 바위을 것이다.
해온이는 극락교 아래에 있는 벽진나루의 흔적을 찾았다. 사람들은 이
근방을 오가며 자전거를 타고 했다. 자전거도로가 산강을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다. 해온이도 다음엔 이 자전거도로를 타고 쭉
달려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극락교 아래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벽진나루 팻말이 보여 얼른
뛰어갔다. 그런데 아까 본 서창나루 마냥 옛 나루터를 알려주는 정도의
형식을 갖추었을 뿐이다. 실제로 배가 다니는 곳은 아니었다. 참
아쉬웠다.
권35에 두 문장을 보면 조금 헷갈린다. “생압진
(生鴨鎭)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빠지면 다리를 놓는다. 극락진
(極樂津) 옛날에는 벽진(碧津)이라 불다.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온이는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둘다
광주읍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다. 분명 지금까지 돌아본
바로는 극락진은 서창나루이고
생압진은 극락교가 있는 벽진
나루인 때문이었다. 모든 기록
이란 정확화지 않은 때가 있다.
더욱이 거리 개념이 두루뭉술한
당시로서는 더욱 그렇다. 아마
도 벽진촌의 극락진을 같은
나루로 보고 기록하지 않았다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이곳 일대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나주 벽진촌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회재 박광옥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도청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한 공로로 1602년(선조35) 나주 벽진촌(碧津村)
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그 사당은 뒤에 벽진서
원 (碧津書院)으로 고쳐졌다.
마침 벽진서원이 대원군 때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지 150년만에
박광옥의 정과 위패를 봉안하는 복설향사가 6월 7일 열렸다. 뜻
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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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구역사이야기 녹음도서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정보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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