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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0 [마지막 뱃사공과 서창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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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7-03 조회수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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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마지막 뱃사공과 서창 주민들]

■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
해온이는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건너편 서창평야로
건너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나룻배가 필요하다.
10여년마다 나룻배를 새로 지어야 하는 데 나무도 귀하고 돈도
들어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이 배를 짓도록 십시일반 돈을 모은 사람들의 선행이 새겨진
비가 있다니 참으로 좋을 듯 했다. 서창치안센터 앞에 있는
농선대시주비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보니 정말
볼품없이 서있는 작은 비석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뜻은 정말 크다고 생각했다.

해온이가 이 비를 들여다보니 서창의 농선을 만드는 데 강선주와
조창좌의 힘이 컸다는 기록을 보았다.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농선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서일중이라는 사람이 3냥을
내놓았다. 당시로는 큰돈을 내놓은 바를 기록해주기 위해 특별히
비석 옆면에 이름을 새겨준 것으로 보인다.
또 뒷면에 지금의 금호동 지역에 살던 화주 김순봉의 이름도
있다. 이 사람은 열심히 집집마다 다니며 한푼 두푼 기부금을
받는 데 노력했다. 화주의 역할은 돈이나 물품을 모아 큰일에
쓰도록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해온이는 이처럼 농선 한 척을 마련하기 위해 서창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모두 동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은
사람이건 돈이 적은 사람이건 자기네 일처럼 참여한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이름을 작은 비석에 다 적을 수
없었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해온이는 서창지역에 지내는 동안 이 농선을 마련하는 데
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다음에 누군가에게
이 좋은 이야기를 말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해온이로부터 누군가를 통해 전달되고 그 좋은 이야기는 그 집의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또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서 250
년을 지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해온이가 기억하는 이름들은 이렇다. 소고미(小古未), 생(英 生), 낙진(樂進), 복덕(福德), 엇선(旕先), 만기(萬起), 설례(雪
禮), 곱단[古邑丹], 수점(水點), 종렬(鍾烈), 용태(用太), 끗련( 唜連), 말례(末禮), 엇단(旕丹), 건약(件若), 세춘(世春), 갑덕(
甲德), 성진(聖眞), 해동(海同), 청동(靑同), 시(英時), 이금(
二金), 복성(卜成), 효재(孝才), 성태(性太), 원발(元發), 숙운( 䎘雲), 유발(有發), 성매(星梅), 상덕(尙德), 연이(連伊), 동(
東榮) 등 모두들 이름만 불다.1) 이들은 오늘날과 같은 성이
없었다. 해온이는 자신의 성을 서(西)씨로 알고 있는 데 농선에
돈을 낸 이들은 자신의 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성이 있다고 해서 무슨 대수인가. 성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마을
일에 나서는 마음은 너도나도 나서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름을 적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너무 적어서
손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이 화주책에 적히건 적히지
않건 해온이는 그 이름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양반들이나 성이 있던 시절이라 그들의 역할이 컸다.
우선은 조창좌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통정(通政)2)이었다.

그는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여 서창에서 지내던 차다. 바라는
마음에서 '通政'이라는 직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가
중앙에서 했던 일은 내외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을 접수하거나
되돌려 보내는 일, 왕명(王命)의 출납, 공문에 대한 검토 등을
담당하다. 즉 정사(政事)가 물 흐르는 것과 같이 늘 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通政'이라는 직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창좌가 만나던 사람들로는 광주의 통정인 석주하(石柱廈),
기언정(奇彦鼎), 한량(閑良)인 한필룡(韓弼龍), 선흥주(宣興周),
조창일(曺昌一), 서일중(徐日中), 유학(幼學) 유진철(柳震哲)
등이 있었다.3) 특히 한량인 강선주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량인 강선주는 통정 조창좌와 함께 농선대시주부에 나란히
이름이 실렸다.
한량이라고 말하면 보통 일정한 직업 없이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며 노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용비어천가>에도 한량의
뜻을 풀이해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속칭한다.’고 하다.
조선 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한량은 비록 형식적
이나마 중인을 대표하는 계층의 하나다. 재산과 학력을 갖추고
유향소를 설립하여 향촌사회를 주도했으며,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적(籍)을 두지
못해 아무런 속처(屬處)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량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존재했다. 시대에 따라 그 뜻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부유하면서도 직업과 속처가 없는 유한층(遊閑層)
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량은 관직이나 학생이 될 자격이 있는 양인(良人) 이상의 신분
으로서 하층 양반이나 상층 평민 중에서 배출되었다. 해온이가
보기엔 강선주는 그런 한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일에
나서서 농선을 제작하는 일에 중심이 되었다.
돈도 있고 지역사회에 향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강선주는 노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하곤 했다. 그래서 서창지역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곤 했다.

■ 희생만 하는 나룻배 일상
강을 건너는 일은 쉽지 않다. 걸어서 건너기는 어렵고 수을
하자니 옷가지며 짐들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서
배를 타야만 한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나룻배에는 10여명이 겨우 탈 수
있다. 때로는 인근의 평야에서 수확한 곡식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뱃삯을 탈 때마다 주기도 하고
농번기 때면 날마다 얼굴을 볼만큼 자주 나룻배를 타는지라
달포에 한 번 씩 줄 때도 있다.
나룻배가 머무르는 강 주변의 공간을 나루터라고 한다. 나루터는
사람들에게 대개 ‘기다림’ 아니면 ‘그리움’을 떠오르게 만든다.
나룻배하면 ‘빈 마음’이나 ‘떠나감’, 혹은 ‘창파(滄波)에 몸 싣고
흔들리는’ 여유로운 모습이 연상된다. 나룻배는 옛 것, 곰삭고
느릿느릿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 기분이 든다.

큰 하천이나 호수로 갈라져있는 두 곳을 이어주는 나루터와
나룻배. 그러고 보면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속 아련한 정(情)과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줄로 연결돼 있지 않나 싶다.
해온이는 만해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해온이는 서창에 잠시 머무르고는 있지만 곧 떠나야 행인이라는
점에서 이 시가 자신과 나룻배 사이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룻배는 한없이 희생을 한다는 느낌이 왔다.

나루라고 하면 뭔가 서픈 생각이 든다. 나루를 건너는 것은 먼
길을 떠나는 것이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별을 의미한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에서 그걸 느낄 수 있고 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노래가사 또한 그러하다.
강은 사실 길을 끊는 장애물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기에 편리한
곳, 또는 꼭 건너야 할 곳에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겼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강 주변에는 나루터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것에 비하면 정작 그에 관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9월 2일조에서야 비로소 나루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날의 실록 기사는 광진(廣津)과 노도(露渡)에
처음으로 별감을 두었다고 했다. 이 기사는 또 임진낙하洛河
한강은 별감을 두고 행인을 조사하지만, 금천노도광주(廣州)
광진용진(龍津)은 별감이 없어 범죄자들이 마냥 들락거린다고
전하고 있다.
한강에 나루가 많이 생긴 것은,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면서
부터이다. 수도로 몰리는 사람과 물자는 한강을 건너야 했고
당연히 나루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경유하기에 두 지방의 세금을 받아 옮기는 길이고,
한강은 또 전라도 일대의 세금과 물자를 바닷길로 옮겨서 서울로
운송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나루에는 관리자인 도승과 나룻배를 부리는 역을 부담하는
나루치[津尺]라 하는 진부4)를 두었다. 이들은 이 일을 하는
대가로 각각 일정한 토지5)를 받았다. 뱃사공은 나루터를 관리
하고 행인을 건네주는 노동을 제공하고, 대신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한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지정한 사공이
움직이는 나룻배를 관선(官船)이라 하다. 하지만 모든
나루터를 나라에서 직접 관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공이 개인적으로 돈을 받고 강을 건네주는 배를 사선(私船)이라
하는데, 그 유래도 오래고 수도 많았다. 나룻배가 있어도 뱃삯이
없다면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더욱이 나룻배마저 없다면
일상생활도 모든 희망도 성취할 수가 없다.
25년 10월 11일조를 보면, 한강진(漢江津)과
노들나루[露渡], 삼전도(三田渡)ㆍ양화도(楊花渡)의 관선은
무거워서 사람과 말이 쉽게 건널 수 없고, 사선은 가볍고 빨라 쉽게
건너지만 삯이 비싸 백성들이 이용하기 꺼린다는 내용이 있다.
사선은 관선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지만,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관선이 있는 곳에도 사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루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뱃사공이다. 사공은 날
때부터 나루를 지키도록 정해져 있는 천민이었기에 평생 나루를
떠날 수 없었다. 한밤중에라도 강을 건너는 양반이 있으면 배를
내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말썽도 많았다.
5년 9월 9일에는 종반(宗班), 곧 종실 몇이 궁노(宮奴
)를 데리고 한강 건너편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동작나루에
와서 나룻배를 빨리 대령하지 않았다고 사공을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사공의 괴로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국가에서 사공들의
생계를 위해 지급한 토지도 양반들이 빼앗기 일쑤다. 효종 6년의
기사에 의하면, 원래 한강의 동작, 노량, 광진, 삼전도, 양화도,
공암 등 나루터에는 병자년 이전에는 모두 위전(位田)을 지급하고
나룻배를 책임지고 갖추도록 했다.
그런데 병자호란 뒤 위전을 한강 가에 사는 사대부들이 강제로
점유한 탓에 뱃사공들이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해온이는 예나 지금이나 있는 자들의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들었다. 최근 뉴스에 대기업 부인과 딸들의 갑질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절로 나곤 했다.
이러니 결과는 뻔하다. 배를 만들지도 않고 수리도 하지 않아
사람들이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6년 10월 7일
기록에 효종은 다시 위전을 찾아서 주고 경기감사에게 나루터의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문헌을 보면 이후에도
양반들이 뱃사공을 털어먹는 일이 계속되었다.

■ 주민들이 세운 2개의 송덕비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뱃사공은 노를 젓는다. 다행히 양반들의
횡포는 사라져 흥얼거리며 노를 젓는다. 그는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벗어던진 듯하다. 뱃사공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준 마을사람을 위해 쓸 줄도 알았다. 보릿고개가 되어 형편이
궁핍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보태줬던 모양이다.
뱃사공은 돈을 벌어 서창마을 안에서 정미소를 운하기도 했다.
정미소는 최근까지도 꽤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이렇게 번 돈의
일부를 마을 일에도 꽤나 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박호련(朴浩連)이다. 그는 산강 극락교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서창나루에서 나룻배를 저었다. 박호련은 본래 이
마을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한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더
가난했고 버팀목이 되어 줄 부모마저도 일찍 여위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빚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갚아야할 빛만 쌓이고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빚에 눌려 질식당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야반도주를 했다. 몇 해를 그렇게 고향을 떠나 타향을
전전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먹고 어느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곱지 않은 시선들만이 그의 귀향을 맞았다. 그래도 채권자들의
양해를 얻어 나루에서 뱃사공 일을 시작했다. 근근이 뱃삯을 모아
빚을 갚았고 가진 배로 화물운송업 같은 사업도 했다.
몇 해가 지나자 그의 살림형편은 크게 펴졌고 1920년대 중반 그는
제법 큰 재산을 모아 지역유지라 불릴 만큼 성공도 했다. 자수성가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주변 세상은 그의 성공담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춘궁기가 되면 어김없이 배를 곯았다.
박호련은 보릿고개 때마다 굶주린 이웃들을 구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오만하거나 인색해지기 쉽다고 하지만 그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마을에 도움을 주었으니 마을 사람들 역시 그에게 보답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리는 뜻으로 송덕비를 세웠다.
농선대시주비 근처에 있는 박호련의 이름자가 선명한 송덕비 2
개이다. 하나는 을축년인 1925년에, 다른 하나는 기사년인 1929
년에 세운 것이다. 두 개나 세웠으니 정말 대단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비석에 적힌 귀를 보면 박호련은 참봉도 한량도 아니었다. 이
비석들을 세울 쯤에 그런 직함을 쓰기엔 너무 늦은 탓이었다. 짧은
비문도 비석의 주인공이 누구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제강점기 때면 그리 형편도 넉넉지 않고 공물 수탈도 있었을 텐데 이
같은 일을 한 뱃사공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리라.
서창나루의 송덕비들은 지금도 길섶의 외진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변변한 안내표지도 없다. 색 바랜 빗돌만이 세월의 덮개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 송덕비의 주인공이 뱃사공 출신이라는 점, 고관대작이나
지주의 흔한 송덕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한
가난했어도 따뜻했던 시절의 기록이라 더욱 값져 보인다.
2개의 비면엔 각각 그를 칭송하는 귀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2개의 비석은 지금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 있다. 박종석 서창동
주민자치위원장 등 지역 주민들은 이들 비석을 조만간 서창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 좋고 서창나루와도 가까운 곳에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해온이는 농선을 만들 때처럼 주민들이 힘을 모으고 지방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극락진 서창나루 마지막 나룻배 띄워
이제 나루와 나룻배는 사라지고 없다. 한강이건 산강이건 팔
물건들을 싣거나 심지어 소도 싣고 운반하던 나룻배와 뱃사공이
지 오래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던 주막과 분 냄새 풍기며 손님을
끌던 술집 여인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나룻배가 닿던 곳곳의 나루에는 쇠와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다리가 놓여 있다. 나룻배를 기다릴 일도 없이 다리만 자동차를 타고
건너면 되는 시대가 됐지만 왠지 여유를 갖는 마음이 사라진 것 같다.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룻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문득 멍하게
강을 바라다보던 풍경도 같이 사라졌다.
옛 서창나루는 사라졌고 지금은 부목으로 만든 현대식 나루가 있기는
하나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위에 차량이 다니는 서창교가 있다.
서창의 마지막 뱃사공은 언제까지 운행했는지 명확하게 아는
주민들은 없었다.
서울에서 나룻배가 마지막으로 뜬 것은 1977년 10월말이다. 그 해 11
월 1일 동대문구(당시의 행정구역, 이하 같음) 면목동과 전농동을
잇는 면목교가 개통되면서 나루터와 나루터 사이를 오가는, 삯을 받는
나룻배는 서울에서 사라졌다. 직업으로서의 나룻배 사공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극락원이 있던 강가에는 큰 바위(계선주돌)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지도를 찾아보니 서창동 1044-5번지이다. 그곳에서 강
건너편까지 줄을 매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바위가 있는 곳이 강이
아니다. 구비진 강에 모래가 퇴적하면서 준설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강줄기가 변했고 지금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 중촌(中村)마을 통장을 지낸 강귀선씨는 “어른들이 예부터 이
바위를 유왕소(流王沼)라고 불지요? 여기서 박호련이라는 사람이
나룻배를 운했는데 물살이 세서 줄을 매단 곳을 따라 가면서 노를
저었다고 해요. 유왕소 위에서는 작은 장터가 서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지적도는 하천부지인데 지금은 강물이 흐르지 않아 지역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아마도 당시까지만 해도 구비지고 강물이 얕아
늪처럼 생겼다 해서 유왕소라 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창교 한 쪽에
당시의 유왕소를 기억하는 듯 유왕소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서창나루에서 박호련이 나룻배를 운하는 것은 당연히 배를 타는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이 옮겼기 때문이다. 강 건너편에서 내려
직선으로 가면 바로 송정5일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송정시장이라
부르고 최근 현대화 리뉴얼을 통해 1913송정시장이라 하여 전국의
관광객이 한 번씩 들릴 만큼 유명해졌다.
서창나루에서 가까운 곳에 지금은 서창농협 서창지점과 창고 등이
있는 데 그 건너편에 광주관아에서 운하는 세곡 보관창고인 옛
서창이 있었다. 이 창고가 있는 서창동 441번지 일대를 가리켜 옛
주민들은 ‘창등’이라 했다. 몇 년전 큰 집이 들어서 창고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이곳 서창나루에서 2km 못되는 가까운 곳에 눌재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이 입향하고 자손들을 낳아 번성했다. 600여년에 달하는
충주박씨들의 세거터이다. 박호련도 충주박씨로 추정되는 데
확실하지 않다. 일부 자손이 나주에 산다는 풍문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라졌다. 과거를 보기 위해 시골 선비를 잔뜩 실었던 나룻배는 없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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