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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4 [왕건이 견훤에 맞서 진을 친 왕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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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9-12 조회수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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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4 [왕건이 견훤에 맞서 진을 친 왕조대]

해온이는 오늘도 금당산에 올라 서쪽으로 길게 흘러가는 산강
물줄기를 바라본다. 강이 막히기 전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이
산강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갔다. 산강이 막힌 것은 불과 50
년 전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서해바다에서 고기를 잡은 배들이
목포를 거쳐 산포에서 닺을 내린 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들을
부렸다. 사람들은 작은 배로 남평을 거쳐 사창나루까지 오곤
했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광경이다. 어디 강변에서만
그랬을까? 뭍에서도 숱한 역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땅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뒤에는 복수심에 불타 사람들은 싸웠다.

배를 이용해 사람이 오가기 쉬운 산강 변인만큼 싸움 역시
숱하게 많았다. 해온이는 아주 옛날 왕건과 견훤이 군사를 몰고
와 진을 치고 싸움을 벌다는 산강과 서창들녁 일대를 아득히
바라본다.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은 먼 옛날 왕건과 견훤이 최후의 일전을
벌인 싸움터다. 해온이가 전해들은 전설에 따르면 나주 공략에
성공한 왕건은 차츰차츰 군사를 내륙으로 진격시켰다. 견훤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대마산(견훤대:甄萱臺) 건너편인
사월산(獅月山)과 백마산 일대에 진을 쳤다. 그리고 어느 날
왕건과 견훤의 군사들은 혈전을 벌다.
왕건과 견훤 부대 간의 전투는 사월산과 대마산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치평동(상무대)일대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의 승리자는 왕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궁예의
부하던 왕건이 나주 일대를 자신의 지지기반세력으로 삼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치평동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왕건의 나주 지배는 불가능했다.

■ 왕조대(王祖臺)
왕건은 나주에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했다. 왕건은 나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광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견훤과 한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다. 왕건은 산강 상류 쪽 산에 군진(軍陣)을 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머문 그곳을 '왕조대'(王
祖臺)라 불다. 왕조내는 '왕이 머물었던 장소' 혹은 '왕이 진을
친 곳'이라는 뜻이다. 왕은 물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다.
왕조대의 본디 이름은 왕건대(王建臺)으나 나중에 왕조대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輿地圖書)에는 왕조대의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왕조대는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주둔했던 곳이다. 그런데 사려 깊지 못한 백성들이
고려 태조의 성과 이름을 장소이름으로 사용해버렸다. 다핸
스럽게도 지금은 다른 이름, 즉 왕조대로 바꿔 부르고 있다'
왕조대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해온이가 여러 자료를
들쳐보니 왕조대라 추정되는 곳은 여러 곳이었다.
에는 '왕조대가 광주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고
견훤대와 마주보고 있다'(王祖臺 與甄萱臺 相對)기록했다.
김정호가 조선후기에 제작한 (大東輿地圖)에는
왕조대가 서창마을 북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에 왕조대라는 지명이 쓰여진 곳은 광주 서창의
북쪽 언저리다. 그 지점은 조선 초 고내상(전라병)이 있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광주와 송정리 간을 연결하는 광송도로
극락교 주변이다. 극락교 주변의 높은 산은 사월산이다.
사월산은 101.5m 높이의 산으로 멀리 견훤대와 마주하고 있다.
견훤이 군진을 치고 군마를 길다는 방목평(放牧坪)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해 군 지휘소로 사용될 수 있는 여건을
지녔다.
사월산은 광주 관아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고 거리도 21 리에 불과해 지도·문헌상의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 때문에 ‘
광주관아 서쪽 30리에 있는 산’ 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에서 서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백마산(白馬山)을 왕조대 자리로 지목하기도 한다.
백마산은 해발고도가 162.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다.
그렇지만 백마산 일대는 산강을 중심으로 해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군사를 지휘하기에 그런대로 적합한 곳이다.
백마산은 금당산~화방산~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
寺洞)에서 멈춰 북쪽으로 솟아오르면서 생긴 산이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있어 주변은 평지다. 그래서 송정리는 물론이고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 사이로 첨단지구 쪽까지 보인다.
왕조대의 위치와 관련해 일부 연구자들은 남구 대촌동 일대에
있는 여러 산봉우리 중 하나를 지목하고 있다. 또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의 봉호마을 뒷산도 왕조대로 추정되는 장소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이 왕건이 머물던 산이라 믿고 지난 1980
년대까지 왕건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다.

■ 견훤대(甄萱臺)
왕건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견훤 역시 군사를 동원해 방어진을
쳤다. 전해오는 말로는 견훤이 진을 친 곳은 지금의 광주 북구
동림동 대마산이다. 광주시 북구 생룡동 뒷산에 있는 토성 터를
견훤대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삼국유사’에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 북촌으로 적혀 있는
점, 담양군 대전면에 무진주의 치소(治所)가 있었다는 설(說),
광주 북구와 담양 일대 동네 이름에 들어있는 龍(용)은 견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생룡(生龍)동 뒷산이 견훤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 문헌들이 '견훤대는 북쪽 15리'에
있다고 기록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북쪽 40리에 위치한
생룡동을 견훤대라 여기기에는 무리가 크다.
동림동에 있는 대마산은 해발 93.9m 높이의 산이다. 대마산은
왕건의 군사들이 대형을 이룬 서창의 산과 마주보고 있어 적들의
동향을 살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대마산 아래 견훤이 말을
키웠다는 방목평은 매우 넓은 곳이어서 군사를 모아두었다가
움직이기에도 좋았다.
에는 견훤대가 황계면(현재의 북구 운암동)
남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횡계면은 광주 북문으로부터
20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산을 대마산으로 여겨도 무방한 듯싶다.

■ 왕건과 견훤의 역사를 품고 있는 광주
해온이는 이런 위치가 어떤 면에서는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왕조대 자리가 서구 사월산이든, 아니면
백마산이든 그것을 밝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 먼
이야기이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견훤대
자리가 지금의 대마산인지, 생룡동 뒷산 또는 대전면 일대의
야산인지도 큰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왕건과
견훤이 왕조대와 견훤대에 군사를
모아놓고 싸웠다는 것 역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돼 있는
광주싸움은 없기 때문이다.
해온이가 들여다 본 조선시대에
작성된 각종 지도와 문헌에 왕건과
견훤을 뜻하는 왕조대와 견훤대가
등장하고 있다. 또 두 사람이
자웅을 겨뤘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보면 당신의 무진주 (광주) 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한 듯싶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발자취와 왕건에 맞서
천하를 호령했던 견훤의 자취가 광주에 담겨 있는 것은 광주가
지닌 역사 자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조대와 견훤대의 정확한 위치를 따지는 것보다는
왕건과 견훤의 대립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왕건이 승자가 되고
견훤이 패자가 됐는지를 따져보는 역사적 고찰이 더 중요한
듯싶다. 해온이는 왕조대와 견훤대는, 두 웅의 흥미로운
대립과정을 되새겨보고 거기서 승자의 교훈을 음미해보는 역사적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태조 왕건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예성강 상단의 우두머리다.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김화·창도·철원)에, 아들
왕건은 송악태수(발어참성 성주)로 앉혔다. 898년 궁예는
송악에서 후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했다.
왕건은 궁예의 장군이 돼 많은 공을 세웠다.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서해안과 지금의 경남 일대 남해안까지 진출해 위세를 떨쳤다.
왕건은 견훤이 장악하고 있는 호남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 왕건은 903년 나주의 토호인 오다련을 찾아갔다.
오다련은 견훤에게 했던 것처럼 왕건에게도 군량미와 군마 등을
제공하며 도왔다.
오다련은 왕건이 광 항화도항과 함평 손불 군유산에 군사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암 신북의 여석산 숫돌을 제공해 병사들이
칼날을 잘 갈수 있도록 했다. 여석산의 숫돌은 매우 질이 좋아서 당시
병사들의 전투필수품이었다. 910년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장화왕후)이 됐다.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다.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됐다.
왕건은 교통과 물자의 요충지인 나주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903년과
909년, 914년 세 차례에 걸쳐 나주를 공략했다. 왕건과 견훤은 암
덕진포와 몽탄강, 극락천 일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다. 903년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를 치기위해 서해안을 따라 내려왔다. 지금의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에 상륙해 성을 쌓고 내륙진출을 모색했다.
왕건은 무안의 다경포진과 임치진을 점령하고 산강을 따라 나주
동강에까지 진출했다. 반격에 나선 견훤 군사들의 맹공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이라는 곳까지 려와 결국은
견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주를 하려해도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모두 견훤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왕건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산강 물이 빠졌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라.
무안 청용리 두대산으로 향하다 파군천 하류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면 견훤군이 쫓아올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왕건이 이를 따라 그대로 행했더니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다. 현재 몽탄교가 있는 지역을 꿈 夢 여울
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909년 암 덕진포에서 벌어진 해상전투에서 왕건은 화공(火攻
)을 이용해 승리했다. 견훤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견훤은 수군을
잃었지만 육상의 군사들은 수도 많았고 용맹했다. 왕건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열세다. 왕건에 적대적이었던 나주의 호족들이
하나둘씩 왕건 편에 서기 시작하면서 나주는 왕건의 중요한
지지기반이 됐다.
913년 왕건은 태봉국 최고 벼슬인 시중에 올랐다. 당시 궁예는
포악하고 교만한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백성들을 괴롭히고
충신들을 함부로 죽다. 민심이 동요하자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철원 포정전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왕건이 왕이 됐지만 고려의 군사력은 견훤의
후백제에 비해 열세다.
그러나 왕건이 신라호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왕건이 동해안을 침략하는 북방민족을 쫓아주는 등
신라백성들을 돕자 신라의 민심이 자연스럽게 왕건에게 넘어간
것이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935년 왕건이 세운 고려에 투항하고
만다. 견훤에 이어 신검도 936년 왕건에게 항복했다.

■ 견훤(甄萱)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왕건은
고려를 세웠다. 후삼국 시대에 왕건을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견훤이었다. 그러니 견훤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고려시대에 정리된 사서 기록 대부분에 견훤의 성정이 포악하게
그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켰던
신라를 멸하고, 왕건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했던 용장이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사람이다. 농사꾼이었으나 후에 상주를 다스리는 장군이 됐다.
견훤의 본래 성(姓)은 이(李)씨인데 15세 때 스스로 견(甄)씨로
고쳤다. 그런데 이 견씨의 음독(音讀)과 관련해 일부 역사가들은
견훤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에서 甄의 음은 진(眞)'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따라 일부
학자들은 견훤이라 하지 않고 진훤이라고도 한다.
에는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로 나온다. 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이 한 명 있어 외모가
단정했다. 그런데 밤이면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방으로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을 했더니
아버지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했다. 딸은
그리했다.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의 큰 지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甄萱)이라 했다'
견훤은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됐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모아 892년(진성여왕 6)여러 성을
공략했다. 곧 무진주(武珍州:광주)를 점령해 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상대는 궁예다.
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반해 <
삼국유사>는 견훤이 광주출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학계에서는 견훤의
출신지를 상주로 보고 있으나 노성태 선생은 진훤(견훤)이 광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성태 선생은 견훤이
광주출신일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거병한지 한 달 만에 5천명을
모은다. 궁예가 3천500명을 모으는데 10년이 걸린 것에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다. 광주출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견훤정권에 참여한 상주출신은 거의 없는 반면 지훤을
비롯한 박규, 김총, 능창 등 견훤 주변인물들이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외에도 ‘아자개가 견훤의 친부이라면 918년 어떻게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투항)할 수 있겠는가?’, ‘견훤의 생부인 아자개가
왕권에게 투항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나
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돼 금의환향하지만 사서에는
견훤에 대한 상주민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등을 제시하고
있다.
견훤은 중국 오월국, 일본과 국교를 맺고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
句麗)와 경쟁적으로 세력 확장을 벌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
金城:경주)을 함락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기도 했다. 견훤의
군사는 무척 강해 몇 차례나 왕건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903년
나주공략에 나선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게 둘러 싸여 몽탄강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927년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돌아가던 견훤을 왕건이 대구 공산에서
기습공격을 했으나 이때도 견훤은 대승을 거뒀다. 왕건이 거느리던
정예기병 5천여 명은 모두 몰살당했고 왕건 역시 죽을 지경에
이르다. 이때 곡성출신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후백제군을 유인해 목숨을 잃었고 왕건은 목숨을 건졌다.
견훤의 세력은 929년 고창(古昌: 안동)전투에서 왕건에게 패한 뒤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은
왕위계승 문제로 견훤과 아들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견훤은 4남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935년 신검 등은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동생
금강을 죽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해
신검토벌에 앞장섰다. 결국 신검도 936년 왕건에 투항해 후백제는
멸망했다. 견훤은 왕건이 아들 신검을 죽이기를 원했으나 오히려
우대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등창으로 황산(黃山: 충남 논산시
연산면) 절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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