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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6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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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15 조회수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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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6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 4월 27일, 해온이는 서창 들녘
하늘에서 남도의 산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라볼수록 애틋한
마음이 드는 강산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다.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렇지만 이 땅은 두
동강이가 돼 지난 70년 동안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해온이가 살고 있는 서창 들녘과 금호·상무에도 남북분단의 상흔이 많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에 광주에
북한군 수용소가 설치됐다. 수용소가 들어선 곳은 상무대 병
내다. 지금의 김대중컨벤션센터 건너편이 수용소자리다.
수용인원이 늘어나자 금호동 공군화약고 옆에 수용소 시설을
마련해 일부를 옮겼다. 그리고 벽진동 사월산 자락 상촌과 벽진
동네 사이에 본격적인 수용시설을 세우고 포로들을 들다.
사월산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은 반공성향의 포로들이었다.
1951년 당시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13만 명에 달하던 포로들은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으로 갈려 충돌이 잦았다. 미군은
포로들의 성향을 가려 반공포로들을 광주와 대구, 논산 등지로
보냈다.
사람들은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서구 금호동과 벽진동, 상무동에 포로수용소가 존재
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실은 광주 서석동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지금의 전남대병원 근처 자리다. 이곳에 수용됐던 포로
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사로잡힌 북한군과 지리산
일대 빨치산(남부군)들이었다.
서석동에 수용돼 있던 빨치산 상당수는 지리산 토벌작전 때
붙잡혔다. 또 불갑산과 추월산 가마골, 화순 백아산 등지에서
활동하다 사로잡힌 공비들도 많았다. 이들은 토벌작전 때 입은
상처와 산속생활 때문에 빚어진 양실조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치료를 쉽게 하기위해 전남대의대 가까운 곳에
수용소가 마련됐던 것이다.
서구 서창동에 있는 백마산은 최근까지도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있던 곳이다.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라 1975년 북한의
남파공작원 2명이 비트(은신처)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사살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백마산은 남북분단의 쓰라린
역사가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
백마산은 해발고도가 134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길목을
지키는 곳에 자리한 탓에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백마산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진을 쳤던 곳으로 전해
진다. 대동여지도에는 왕건의 군사가 머물다는 왕조대(王祖臺)
가 표기돼 있는데 일부 사학자들은 그 장소로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뒷산과 백마산을 꼽고 있다.
백마산의 이름도 ‘우뚝 선 뫼’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뚝 선 뫼가 몰매-말매-마산으로 음 변화가 생겨 이어지다가
종국에는 백마산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백마산의 원래 이름은 방마산이었는데 눌재 박상 선생의 부친의
꿈과 관련돼 백마산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눌재 선생의 아버지는 박지흥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실망해
충남 대덕에서 처가가 있는 광주로 낙향했다. 박지흥은 장성
갈재를 넘다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흰 말 두 마리를 내주면서 말들이 멈추는 곳에서
정착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백마는 광주목 방하동 방마산에
이르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흥은 방마산이
있는 방하동에 터를 잡고 살게 됐고 이때부터 방마산은 백마산이
됐다는 것이다.
이 백마산에 군사조련장이 들어선 때는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588년쯤이다. 군사들을 조련한 사람은
바로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 의병장이다. 김세근 의병장은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장정들을
불러들여 군사로 만들었다. 광주는 물론이고 화순과 장성
등지에서도 의병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다.
김세근 장군이 의병들을 키워낸 곳이 바로 백마산이다. 백마산
에는 의병들이 조련을 한 곳으로 전해지는 조련장과 말을
매두었다는 말굴이 등이 남아있다. 서창 사람들은 조련장이
있었다는 계곡을 수련골(수련곡)로, 김세근 장군이 무더운
여름철에 머물다는 조그만 암굴을 장수골로 부르고 있다.
장수골은 백마산 정상 부근에 있다. 해온이는 김세근 장군의 옛
흔적을 통해 당시를 상상해보려고 장수골에 가보기로 했다.
서창동사무소에서 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바위절벽이 있다,
상당히 가파른 곳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으나 조심히 내려가면
깊이 2m 정도의 굴을 찾을 수 있다. 이 굴의 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구멍이 움푹 패어있는데 예전 사람들은 키가
컸던 김세근 의병장의 상투 때문에 생긴 흔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드나들었다 하더라도 상투 때문에 바위에
흔적이 생길 리 만무다.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과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백마산에는 김세근 의병장이
군사를 조련할 때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과 병사들이 마셨던
샘물인 옥동샘이 있다.
백마산 아래 동하마을(세하동 132-1, 동하길 47) 김성철씨
(김세근 장군의 후손)씨의 집 담에는 무등산 김덕령 장군과
백마산 김세근 장군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떨어졌다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백마산에 사는 김세근 장군이 던진 바위는
무등산까지 날아갔으나 김덕령장군이 무등산에서 던진 바위는
백마산까지 날아오지 못하고 백마산 아래 동네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다. 이 역시 김세근 장군의 용맹함을 표현하기
위한 후세 사람들의 과장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이런 여러 과장된 이야기와 전설 속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김세근 의병장에 대한 백성들의 흠모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백마산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김세근 의병장과 의병들이 구국의 충정을 다진 곳이다. 백마산을
찾아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병들의 발길과 함성이 스며있는
계곡과 능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 유학자 김세근이 의병장이 된 까닭은?
삽봉 김세근의 아버지는 김석경(金碩慶)이다. 김석경은 원래
경남 함안군 마륜동에 살았으나 1587년 전라도 흥양(興陽
:지금의 고흥)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고흥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왜구의 출몰이 잦고 또한 너무 외진 곳이어서 살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다시 광주목 서창으로 이사를 왔다.
김석경 집안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주한 것은 조상 김일손(金
馹孫)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김일손은 1498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재위 4년 때 훈구파인 유자광과 이극돈이
연산군을 충동질해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대거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이다.
유자광 등은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을 사초에 삽입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 김일손이 사초에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삽입한 것은 연산군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격동케 했다. 연산군은 세조를 비난한
것은 곧 세조의 후손인 자신을 비난한 것이라며 김일손 등을
죽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묘를 파헤쳐 시신을 훼손(부관
참시)했다.
이후 조정은 훈구대신들의 차지가 돼버렸다. 남의 사림학파
출신들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그래서
김석경은 아들들을 데리고 전라도로 이사한 것이다.
김세근선생은 경상도에서 살던 시절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조헌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의
깊이가 남다른 김세근을 총애했다.
김세근 선생은 27세 때인 선조 9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다음해인 28세 때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35세에는 종6품인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를 지냈다. 종부시 주부는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자리다. 이때
김세근 선생은 율곡 이이와 함께 ‘양병론’(良兵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태평시대에 군사를 키워야한다는 양병론은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邪論)이라며 묵살했다. 눈앞의 이익만
챙길 뿐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는 간신배들이 가득한 조정의
모습에 실망한 김세근 선생은 낙향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세동마을로 돌아와 백마산에 연병장(練兵場)을 마련하고 뜻을
같이 하는 장정들과 함께 4년여 동안 무술연마에 힘쓴다.

■ 임진왜란과 의병장 김세근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김세근 선생의 나이
42세 때다. 고경명이 담양 추성관(潭陽 秋城館)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세근 선생은 5
월 26일 의병 100여명을 데리고 담양으로 출군(出軍)했다.
김덕홍, 유팽로, 안, 양대박, 하정, 신건, 박광종, 문홍헌,
이근, 고몽룡, 강활등 의병장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를 결의했다. 유학자에서 의병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3일 뒤에 김세근 의병장은 온몸에 열이 올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여서 출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몸이 낫는 데로 뒤쫓아 가기로 하고 일단
세동마을로 돌아와 몸을 추슬다. 그런데 6월 12일 스승 조헌이
보낸 격문을 받아보게 된다. 격문을 읽으며 김세근 의병장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몸이 다 낫지는 않았지만 의병을 데리고
충청도로 올라가 고경명 의병군과 합세해 왜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김세근 의병장은 수련골에서 함께 훈련을 했던 이대연과 박춘경,
정화성 등을 불다. 그리고 서둘러 의병들을 모을 것을 당부
했다. 300여명의 의병이 모아지자 김세근 의병장은 출정을
결심했다. 김세근 의병장은 부모의 묘에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부인 한씨(韓氏)와 열두 살 된 아들 추남(秋南)을 불다.
모자가 자리에 앉자 김세근 의병장은 유서를 건넸다. 아내에게
허리에 차고 다니던 요도(腰刀)를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 칼은 부인에게 남겨주고 가리다. 이 칼이 녹슬거나 변색하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칼을 받아든 한씨 부인은 한없이
울먹이기만 했다. 일본군과 싸우러 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세근 의병장은 6월 18일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전주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관군 대열에 합류, 충청도 동(永同)
황간(黃澗) 전투에 참가해 왜군을 크게 무찔다. 그러나 고경명
의병장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1592년 7월 10일
와평들에서 순절했다.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가선대부
병조참판의 벼슬을 추증 하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1등
공신으로 기록한 뒤 녹권(錄券)을 하사했다.
김세근 장군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남편의 시신 없이 초혼장을 치다. 그리고 ‘부사어충
처사어열 인지본’(夫死於忠 妻死於烈 人之本:지아비는 忠에
죽고 지어미는 열烈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의 당연한 도리라)
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자결에 쓴 칼은 김세근
의병장이 왜군과 싸우러 가면서 풀어준 요도다. 나라는 한씨
부인에게 정부인(貞夫人)을 증(贈)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 김세근 의병장을 모시고 있는 학산사
1952년 광주서중 교정에서 임진왜란 6주갑(360주년) 임란
공신위령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광주 유림과 후손들은 김세근
의병장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김세근 의병장이
순국한 7월 10일, 단을 세우고 창열단(彰烈壇)이라 이름
지었다.
6년 뒤인 1958년 김세근 의병장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학산사(鶴山祠)를 지었다. 학산사는 팔학산 기슭에
자리한 불암(佛岩)마을에 있다. 행정 주소로는 광주광역시 서구
학산사 경내는 본 건물인 학산사우와 창열문, 제택인 경의당(景
義堂), 묘정비(廟庭碑)로 꾸며져 있다. 묘정비는 사우의 내역을
기록해 뜰에 세워둔 비를 말한다. 당초 학산사우에는 김세근
의병장이 출전하면서 부인에게 건네고 간 요도와 선조임금이
하사한 선무원종훈 녹권(錄券)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도난 등의 위험이 많아 현재는 담양군 소재 제봉관에
보관돼있다. 담양군은 제봉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담양
추성관에서 의병 고경명 장군을 비롯한 호남의병장들의 유품을
모으고 있었는데, 김세근 의병장 후손들이 이 뜻을 받아들여
제봉관에서 보관토록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학산사는 김세근 의병장의 충절을 기리는 사우인 만큼 그에
합당한 관리가 이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학산사는
문화재나 기념물로 등록이 돼 있지 않은 관계로 후손들이 관리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세근 의병장의 후손인 학산사
보존회 고문 김채곤(金采坤) 선생과 학산사보존회장 김종학(金
鍾鶴) 선생 등이 애를 쓰면서 관리하고 있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채곤·김종학 선생이 경내의 나무들을 잘라내고 청소를 하는 등
관리를 하고는 있으나 사우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는 경비가 크게
들어가기에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이런 탓에 외삼문은
붕괴위기에 처해 있다. 건물이 더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몇 개의
쇠파이프를 세워 지탱토록 하고 있으나 조마조마하다.
서구문화원 정인서 원장 등이 문화재지정과 기념물등록을 위해
관계기관 여러 곳을 뛰어다니며 애를 쓰고 있으나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해온이는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깊다. 나라를 위해 순절한
의병장을 기리는 건물이 나라의 무관심 가운데 이렇게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서둘러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 선열들의 장렬한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선열들의 정신을 잘 섬기고 흔적을 잘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마산과 학산사가 호남의 의로움을 널리
알리는 광주의 명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김세근 의병장의
열열늠름(列列凜凜)한 의적(義跡)이 만방(萬方)과 만세(萬世)에
전해졌으면 싶다.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6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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