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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5 [극락정과 극락원 그리고 극락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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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10-19 조회수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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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15
극락정과 극락원 그리고 극락강

■ 아름다운 풍광에 극락이라 여겨져
“서창동에 가면 극락이 있다.” 해온이는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면 극락이라고 부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락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이 상주하고
있는 불교인들의 이상향인 불국토라고 한다. 그래서 극락은
즐거움만이 있는 곳[樂有]이며, 이 즐거움은 아미타불에 의해서
성취된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에 따르면 극락세계는 서방으로 기천만
기십만의 국토를 지나서 있는 곳이다.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이 있다. 서창동이 바로
그런 곳이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널따란 산강과
극락강이 있고 극락평야라 부르는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극락이라는 지명을 가진 데가 얼마나 있을까. 해온이는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곳이 유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주변의 정자와 농사짓는 농민들의 모습, 산세와 강이 흐르는
풍광이 좋고 아늑한 곳이라 하겠다. 마치 극락이 하늘에서 내려와
앉은 듯 했다.

서창에 있었던 ‘극락’이라는 지명은 극락진, 극락원, 극락정,
극락창, 극락평 등이 있었다. 극락진은 서창나루로 부르며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가 극락교가 개통되면서 그 흔적만 표지판
으로 남겼다. 극락진은 서창의 모든 사람들과 농사짓는 사람들의
통로다. 또 전남의 여느 지역에서건 광주읍내로 갈 때에는
이곳을 거쳐 지나가야 했다.
제35권 전라도 광산현에는 극락원이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대에는 산강이 흐르고,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조선 중엽까지 한양길 중 하나다.
극락원과 극락정은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숙소나 흥취를
돋우는 장소다.
하룻밤 이곳에 묵었던 관리나 선비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저절로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먹을 갈고
붓을 잡아 화선지 위에 즉흥적으로 시를 써내려가거나 그 옆에
사군자 하나쯤 흔적을 남겼을 법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 어
대장과 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 의정에는 두 번이나
번이나 올랐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도
158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내를 순찰하면서 들려
누정에 오르고 조망하며 그 감흥을 시로 풀어냈다.
경북 상주 출신인 하음(河陰) 신즙(申楫, 1580~1639)이
호남기행(湖南紀行) 중 극락원에 달린 극락정(極樂亭)에서
읊은 시가 있다. 극락정 주변의 풍광 모습을 마치 그림에
그려놓은 듯 눈앞에 보다.

■ 극락정에 올라 시 한 수 읊으니
극락정은 극락원에 딸린 정자다. 극락원에서 하룻밤 묵는
이들은 한번쯤 극락정에 앉아 산강과 극락평야를 보고 석양에
노을 지는 모습에 술 한 잔 없어도 풍광에 한껏 취했을 법하다.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원(院)은 관리나 여행자를 위한 여관
이었다. 초기에는 절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운하기도 했다.
극락원은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라진 역이다. 조선시대 역원의
운이 활발하던 시절, 광주에는 경양역과 선암역 등 2개의 역과
함께 10여개의 원이 있었다. 극락원도 그 중 하나다. 서창도
한때는 ‘극락창’으로 불렸다. 서창 창고 자리에 위치했던 여관
극락원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마저 극락강(산강의 별칭)
으로 바꾸어 버린다.
지금 극락원과 극락진은 어디일까? 해온이는 그 자리가
궁금했다. 오늘날 광송간 도로가 지나는 곳에 놓인 다리가
극락교다. 극락진이 있었던 곳은 극락교에서 한참 아래쪽,
지금의 신 서창교 일대다. 신 서창교 입구 부분(서창동 594
번지)이 서창 나루터 자리로 극락진이 있었던 곳이고, 그 뒤
야트막한 언덕자리(서창동 산4번지)에 극락원이 있었다.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가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
~1638)이다. 그가 1629년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의 전횡을
질타했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내려가며 극락원에서 잠시
머물다. 그리고 시공간을 넘어 당시의 감회를 느끼게 만드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은 우부승지를
지내다 1638년 나주목사로 부임 받고 가는 길에 극락원에
머물다. 그는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친했던 계곡 장유의 시가
극락원에 있어 반가운 나머지 ‘광주 극락원의 계속의 시에
차운하며’라고 시를 읊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오고가며
머무를 때마다 이곳에 남겨진 시가 꽤 있었을 법 하다.
극락창은 근방의 세곡을 모아두는 창고다. 극락원은 어느
시점엔가 세곡을 보관했던 극락창으로 바뀐다. 나중에 서쪽
창고라는 이름인 서창으로 부르면서 이 지역의 세곡을 모아
운반했던 곳이다. 서창에 보관된 세곡은 첨단지구 무양공원
근처의 동창(東倉)의 세곡과 함께 산강을 이용하여 산포의
산창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 온 대형 세곡선에
의해 서울 경창(京倉)
으로 올라간다.
극락평은 서창평야로
부르는 극락평야이다.
서창 지역 사람들은 강
이 쪽에 살다가 농사를
지을 때는 서창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반대편
에서 농사를 지었다.
배를 타고 건너다니는 그 모습이 극락을 오가는 평온한 모습
이었다. 이런 곳이 이곳 서창이었던 터라 사람이 모여들었고
삶의 터전이 되었다. 해온이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행복을
누려 극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들이 겹쳐 ‘극락’이 있는 서창동은 굉장한 상상의
세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도 서쪽은
전반적으로 운세가 상쾌하고 결실의 계절처럼 금전운과
애정운이 강한 방위로 알려져 있다. 서창은 서창평야라고 부를
농사를 짓는 면적이 많지만 최근 상업운도 따라 부자들이 많은
동네이다.

■ 의로움의 자취 곳곳에 남아
서창 출신들 가운데 의로움에 몸을 바친 이들이 많다.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 삽봉 김세근과 회재 박광옥, 일제강점기 때의 악포
김홍두와 양진여 양상기 부자의병장, 김원국 김원범 형제의병장
등 서창과 연이 닿는 분들이다. 그밖에도 김극추, 박광조, 박대수,
박지효, 박희수, 엄소사, 황호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다.
서창에 가장 큰 나눔이 있었던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콘텐츠를 통해 서창은 의로움이라는 키워드로 마을 역사를
찾아내거나 마을의 이야기를 풀어낼 스토리텔링을 해내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를 통해 광주지역 청소년 교육에 올바른
광주정신으로 심어줄 수 있고 정체성과 가치관 확립에도 기여할
것이다.
서창동은 현재 용두동, 마륵동, 세하동, 벽진동, 매월동까지를 그
행정구역으로 한다. 하지만 서창동에서 분리된 금호1,2동과
풍암동을 생각한다면 그 역은 훨씬 넓다. 아마 서구의 반은
서창일게다. 더욱이 서창동과 금호1,2동, 풍암동 4개 동 주민들이
매년 번갈아가며 서창골 단합대회를 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서창의 자연은 더욱 좋다. 나지막하지만 아름다운 산들이 많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서창
산행을 꾸준히 하고 있고 서창의 6산을 하루에 종주하는 분들도
있었다. 서창의 6산이라고 하면 개금산, 백마산, 송학산, 팔학산,
봉황산, 사월산이고 여기에 덧붙여 금당산과 화방산을 빼놓을 수
없다.
개금산은 산봉우리가 세 개가 마치 닭의 볏을 닮아 계관산(鷄冠山
)이라 했고 백마산은 새끼를 거느린 말의 형상이며 김세근 장군의
수련장소다. 각시봉은 부부가 함께 오르면 금술이 좋아진다 했고
소나무와 학떼가 많았다는 송학산, 여덟마리의 학이 날개짓하는
팔학산, 사자앙천(獅子仰天)의 모습을 한 사월산, 무등산 외에도
금당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산으로 여겼던
곳이다.
서창의 산과 극락강 주변에 있는 만귀정, 수월당 등의 정자와 식재
등의 재각, 박호련 시혜불망비와 열부유인김씨행적비 등 각종 비와
효행비 등은 우리에게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하나 발굴한다면 좋을 일이다. 박광옥의 전평호수는 어떠한가.
시민들의 힐링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창에 있는 이야기로는 박광옥의 특한 딸 ‘주역각시’와 ‘김세근과
김덕령의 힘겨루기 바위’,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 ‘매월동 과부와
도깨비’ ‘박상과 고양이’ ‘왕조대와 견훤대’ ‘눈물바위의 푸른 이끼’, ‘
백마산 장수굴’, ‘용이 된 잉어할머니’ 등 제법 재미가 있다.
결국 서창의 아름다움을 지역 문화콘텐츠로 삼고 지역의 의로운
정신과 인물, 이야기들을 덧붙이면 충분한 마을투어코스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도시화되고 큰 창고들이 들어서면서
옛 흔적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간직해야 할 서창의 ‘꿈’이다. 그래서
해온이는 극락정과 극락원을 오늘에 복원한다면 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극락강, 지도에도 없는 강
광주에 이상한 강이 하나 있다. 광주 사람들은 다 이 강을 말하는 데
실제 지도에는 없는 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강을 말하면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위치도 알려준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포털사이트 지도에 들어가 극락강을 검색하면 또 나오지는
않는다.
산강이 황룡강과 합류된 곳에서 광주천과 만나는 곳까지를 흔히
극락강이라 부르고 있다. 서창동 옛 극락원 앞을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도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광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강 이름이다. 해온이는
지도에도 없는 강이 광주의 대표적인 강이라니 참으로 의아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강이다. 이름도 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후에 가고 싶어하는 곳 가운데 가장 먼저
손에 꼽는 곳이다. 바로 극락이다. 이 이름을 딴 극락강이 광주에
있다. 이 극락강은 지금도 인근 서창지역 농업용수 공급의
생명원이기도 하다.
광주의 대표적인 산과 강을 든다면 무등산과 극락강이라 말한다.
광송간 대로를 따라 서구와 광산구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이름도
극락대교이며 극락초등학교, 극락철교, 극락육교, 극락뚝길
등의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극락강변에 있는 철도정거장 역시
극락강역이다.
극락강역은 1922년에 생겼으니 4년만 있으면 100년이 된다.
극락강역 건물은 화재로 인해 새로 1958년에 지어져 올해
나이가 환갑이다. 그래서 극락강역 건물은 한국철도공사 지정
철도문화재이다.
극락철교 옆 언덕에 자리한 풍정에서 강줄기를 바라보면 마치
극락에 온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런 명칭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극락강은 아홉 번은 강줄기가 굽었다 하여
구곡(九曲)이라고 한다. 극락강변은 오래전부터 주변 초등학생
소풍지역으로 유명했다. 1960~70년대에 극락강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극락강은 어디에서 어디를 말하는가. 1759년 에 황룡천이
칠천 하류와 합류하는 지역을 극락강이라 하고 남평천이 왕자대 밑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는 옛 기록이 있다. 김정호의
에도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되기 바로 직전에 극락진과 극락평
이라는 표기가 있다.
해온이는 이렇게 말로만 들으니 정확한 장소를 알 수가 없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손으로 집어 극락강을 확인했다. 극락강은 오늘날 황룡강과
산강이 합류한 서구 용두동부터 북동방향으로 올라가면 지금의
극락강역이 있는 인근의 광신대교까지 10km 정도로 말한다.
그런데 다른 향토지리학자는 산강의 발원지라 말하는 담양
용소에서부터 황룡강이 만나는 지역까지를 극락강이라 하고 있다.
하지만 극락강이 어디까지이든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행복한 땅이 극락이 이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연관(李淵觀, 1857~1935)의 ‘신묘유서석록(辛卯遊瑞石錄)’에도
이런 귀가 있다. “고개를 들고 멀리 바라보니 장원봉은 문장의
빼어난 기색이 있었고, 극락포(極樂浦)는 부귀의 깊은 근원이
있었다.” 극락포구 주변으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이란 지명은 어떤 연유로 붙여졌을까? ‘극(極)’은 ‘다할 극’이고,
‘락(樂)’은 ‘즐길 락’자다. 산강과 광주천이 합류되는 곳은 마치 두
물줄기가 나무의 밑동에서 두 줄기의 가지가 위로 뻗은 형태와
흡사하다. 끝[極]과 뜻이 통한다. 이어 불교용어로 미화되면서 ‘락(樂
)’을 붙여 ‘극락진(極樂津)’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극강(極江)’으로 표기되면서 극락강이
되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광주 극락면 황계리, 지금의 북구 운암동 대내마을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문인 극재(克齋) 이완상(李玩相, 18871953)이 풍정
에서 극락강을 바라보는 풍경을 읊었다.

이완상은 광주의 서쪽을 흐르는 강, 극락강의 모래밭을 잠시 거닐었던
듯 하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인근 학교의 소풍장소던
것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충분히 풍광이 좋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온이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이 극락이니까.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5 [극락정과 극락원 그리고 극락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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