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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2 [동학농민군의 통한이 스며있는 유덕동 덕산]
개발자
날짜 2018-08-06 조회수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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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통한이 스며있는 유덕동 덕산

해온이는 산강변의 하늘에 올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서구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볼수록 정겨운 풍경이다. 지난 세월 많은
일들이 산강변과 금당산 주변, 그리고 지금의 유덕동과 마륵동
일대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풍상과 함께
잊혀졌다. 해온이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잊히고,
우리가 길이 기려야 할 역사적 유적지가 방치되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광주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있는 덕산(德山)은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자세히 모르기에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있는 장소 중의 하나다. 유덕동 덕산은 우리 근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덕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그 일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덕산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성을
공격했던 농민군이 큰 피해를 입고 광주와 남평, 장흥으로
철수하면서 숙했던 곳이다.
농민군은 1894년 7월과 10월, 11월 나주성을 공격했다. 11월
27일 함박산 전투를 끝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동학농민군 지도자
최경선과 손화중은 농민군을 수습해 후퇴했다. 농민군들은
광주와 남평, 장흥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때 상당수
농민군들이 하룻밤을 머물면서 후일을 도모한 곳이 덕산이다.
덕산은 외세에 맞서 싸우던 농민군들의 의로움이 스며있는
곳이다. 한편으로는 농민군의 한과 울분이 하늘을 찌르던
곳이기도 하다. 해온이는 당시 동학군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 유덕동 덕산의 현재 모습
덕산은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德興)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덕산은 해발 35m에 불과한 산이다. 해온이는 덕산에
올랐다. 산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나 야트막하다. 극락강을 앞에
두고 개활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라 낮은 산이어도 주위를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실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강변과
평야지대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현재의 덕산은 중간에 길이 나고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산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다. 덕산 정상에는 400
여년 된 당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당산목이다. 높이가
27m에 달하고 둘레만 5.6m에 달한다. 해온이는 두 팔을 벌려
당산나무를 품에 안아보았다. 어림도 없었다. 몇 번이고 두 팔을
벌려 빙 돌았다. 그제야 해온이는 이곳에 올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때 이 당산나무가 죽을 뻔 했다. 지난 2012년 덕흥동
주거환경개선사업의 하나로 덕산을 절개해 소방도로를 내고
소공원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느티나무가 훼손당해 한때
당산나무가 죽어갈 정도로 고사(枯死) 직전에 있었다. 다행히
서구청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살려냈다. 지금은 서구청이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현재 덕산 주변에는 이런저런 시설과 건물들이 가득 있다.
예전에는 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구릉이었을 싶은 곳에는
시각장애특수학교와 시각장애복지시설이 들어서 덕산 정상을
바라보고 있다. 축대를 쌓고 지어올린 3층 건물이다 보니 덕산
정상보다 키가 10여m는 더 커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오그라든
덕산이 더 왜소해 보이는 이유다. 교회 건물과 철강재를
취급하는 회사들이 덕산 중턱에 즐비해 산 형상은 가늠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 유덕동 덕산이 지니고 있는 의미
덕산의 느티나무는 덕흥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다. 덕흥마을
주민들은 240여 년 전부터 덕흥마을 당산제를 지내왔다.
덕흥마을은 산강과 광주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부근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두드러져 보이는 덕산에 키가 큰 나무가
있으니 자연 산강을 오르내리는 뱃사공들에게는 물길을
헤아리는 이정표가 됐다. 20여년 전 당산제를 모실 사람이 없어
당산제도 시들해졌다. 그러다가 서구문화원 정인서과 오광교
서구의원의 노력으로 2018년 정월대보름 때 덕흥당산제를
복원했다. 덕흥동 마을 주민들이 서로 앞서 당산제 복원에 참여
했다.
느티나무에 관심을 주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토박이 주민들
에게는 여전히 험하고 외경심을 갖게 하는 노거수지만 외지
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그저 ‘큰 나무’에 불과할 뿐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역사책에서 간단히 접했던 ‘
수많은 과거 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주 전투에서 패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덕산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울 리가 없다. 그저 그렇고 그런 야트막한 구릉과 느티
나무에 불과하다.

동학농민전쟁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이 땅의 100
만 백성이 분연히 일어서 1년여 동안 치른 외세항쟁이었다.
그러는 동안 농민군들이 얼마나 장렬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면
덕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바뀔 수밖에 없다. 해온이는
그래서 덕산에 더 애정이 갔다. 그 모습을 이 느티나무도 지켜
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에는 동학농민혁명(전쟁) 관련 유적지가 수 백 곳(이
역시 공식적으로는 10곳 정도에 불과하다)에 달하나 광주에는
공북루와 광주관아자리(지금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자리) 등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광주에서 동학농민군들의 함성과 자취가 묻어있는 곳은 유덕동
덕산이 유일한 장소다. 동학농민혁명은 구한말 의병의 뿌리다.
항일독립운동이 바탕이 된 정신이기도 하다. 광주의 의로움은
대몽항쟁과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을 거쳐 구한말 동학농민
혁명(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은 민족·민주정신으로 승계돼 이
땅의 민주주의를 꽃피워냈다. 이 근본의 중심에 동학농민혁명이
있으며 그 처절했던 현장이 바로 덕산이다. 해온이는 덕산이
자랑스러웠다.

■ 덕흥마을의 역사
극락강(極樂江)은 광주 치평동과 쌍촌동 사이의 산강 구간을
일컫는 명칭이다. 에는 극락강이 ‘칠천(漆川)’
이라고 표기돼 있다. 덕흥마을은 극락강을 앞에 두고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500년에 달한다. 원래 한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나주 오씨와 남평 문씨들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덕산으로 광주군(光州郡) 덕산면에
속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행정구역 개편 당시
동작리(東作里)와 서작리, 황계면 동배리, 내정면 신촌리(新村
里)와 평촌리(平村里) 일부가 합해져서 극락면(極樂面)
덕흥리가 됐다.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덕흥동이 됐다.
현재의 서구 덕흥동은 법정동이다. 행정동인 유덕동(柳德洞)의
관할 하에 있다.

■ 동학농민군의 나주성 공격 배경
1894년 1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민란’(古阜民亂)
이 일어났다. 고부민란은 군수 조병갑의 악랄한 수탈 때문에
비롯됐다. 그해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
瑞)최경선(崔景善) 등과 고부군아를 습격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던 죄인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수탈한 수세미(水稅米)를
되돌려 주었다. 조정은 농민들의 기세에 놀라 조병갑을 체포해
의금부로 압송했다.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농민들을 회유해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안핵사로 임명을 받고도 한달여 뒤늦게 도착한
장흥부사 이용태는 벽사 역졸 800명을 고부로 이끌고 가 이미
해산된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다뤘다. 민가를 불 지르고
남정네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아녀자들에 대한 강간도 이뤄졌다.
고부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
최경선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창의문을 발표했다. 이들 동학지도자들은 군사를 일으킨 이유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웠다. 전봉준이 동학군을 모으자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호응했다. 동학교도와 농민
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돼 농민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전봉준은 1894년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후에 무장군과 흥덕군이 합해져 고창군이 됐다). 여기서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손화중과 김개남은 총관령(總
管領)직을 맡아 전봉준을 보좌하게 됐다.
동학농민군은 광과 함평 관아를 점령한 뒤 농민군을 나눠 나주와
장성으로 진격했다. 이는 홍계훈의 경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농민군은 1894년 음력 4월23일 장성에서 홍계훈 부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4월 27일에는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성까지 함락시킨다.
전북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고창과 광, 함평, 무안을
점령하고 나주까지 쳐들어올 기미를 보이자 나주의 관군은 성을
굳게 하고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무너져 있는
성을 보수하고 무기고에 있는 전투 장비들을 점검하는 등 농민군
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했으나 청나라와 일본이 군대를 파병
하자 5월 7일 홍계훈과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이후 7
월초에 전주감사 김학진과 합의하에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주와 남원, 운봉 등 세
고을의 수령은 집강소 설치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림들의 세력이
크고 봉건세력이 강한 나주에서는 농민군들이 행정과 치안을 맡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나주는 1895년까지 나주목이었다. 갑오경장 때 전국 8도가 23개
관찰부로 바뀌었는데 이때 전라도는 전주남원나주제주관찰부로
분할됐다. 그런데 1896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전국은 다시 13도로
구분됐다. 이때 역사상 처음으로 전라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처음
생겨났고 관찰부 소재지가 광주가 결정됐다.
농민군은 금성산(錦城山)을 거쳐 나주성에 이르러 수성군과 전투를
벌다. 나주성에는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 남고문(南顧
門) 북망문(北望門)이 있었는데 전투는 주로 서성문에서
치러졌다. 농민군은 여러 차례 나주성을 공격했지만 무너뜨리지
못하고 큰 피해만 입고 물러갔다.
최경선과 오권선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나주성 함락에 실패하자
전봉준은 음력 8월 13일 직접 나주성에 찾아와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다. 전봉준은 부하 10여명만 나주목사
내아(羅州牧使內衙)에 데리고 들어와 민종렬에게 수성군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민종렬이 이를 거부하자 회담은 결렬
됐다. 이런 이유로 나주성내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았다. 성
밖의 면리(面里)에만 설치됐다.
전봉준은 9월 12일 재봉기를 결정했다. 삼례에 온 최경선에게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맡겼다. 이 편지
에는 손화중에게 광주와 나주 방면의 방비를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전봉준은 북접의 호응을 얻어 논산 공주로 진격할 것을 결정
했다. 전남지역의 농민군은 북상하는 농민군의 배후를 지키도록
했다. 즉 일본의 군함이 서남해안에 상륙해 배후를 공격하는
것과 부산에서 출진한
일본군이 대구, 진주, 하동,
광양을 거쳐 농민군의 뒤로
접근해오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전남지역 일부 농민군들은
전봉준과 함께 공주 전투에
참가하나 대부분은 현지에
남아 일본군과 경군의 공격
에 대비했다. 장흥과 무안,
광의 농민군 주력부대
들이 북상하지 않고 전남에
남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광주의 손화중도 전봉준의 주력부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전봉준이 일본군이 서남해안에 상륙해 배후를 공격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 전남지역의 반 농민군 세력의 중심지인
나주의 관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커서이다.

1894년 음력 10월 15일께 손화중이 이끄는 광주농민군과 오권선
휘하의 나주 농민군은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나주 동쪽에서 20리쯤
떨어진 침산(砧山: 지금의 광산구 하산동 446-2 일대), 송정리 옆의
선암(仙巖: 지금의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 일대), 북쪽 용진산(龍珍
山) 일대로 진출했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성 밖으로 출정하여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600명의 수성군은 10월 20일 석현리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농민군 선발대와 접전을 벌다. 수천 명의 농민군은 침산 뒤 봉우리에
진을 치고 공격해오는 수성군에 맞서 싸웠으나 포를 쏘며 공격해오는
수성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농민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에는 침산 전투장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적과 냇물 하나 사이의 거리에 이르니 적들은 조총을 난사했다.
도통장이 강 언덕으로 가까이 가서 강충삼에게 대완포를 쏘게 하니
포탄이 떨어진 곳에 적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죽어갔다. 또 천보총을
연발로 쏘아대니 적들은 크게 무너지고 인마(人馬)가 서로 밟혀
사망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적들을 소탕시켜 버리도록 하고 군을
소집하여 점검해보니 한 사람도 사상자가 없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초
나주를 다시 공격했다. 민종
렬이 보낸 나주 수성군은 11
월11일 용진산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다음날
농민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무안의 배상옥 농민군도
서남쪽에서 나주성 을 공격
하려 했다. 11월 17일 배상옥
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공략을 위해 나주 남서쪽으로 30여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고막포와 고막원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수에 대해 은 5~6만 명으로 적고
있다. 이 숫자는 관군들의 전과를 부풀리기 위해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고막원에 모인 농민군은 무안과 함평은 물론이고 진도 등지에서
온 농민군들도 많아 상당한 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농민군을 물리쳤다.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고막원 일대에 집결해 나주를 공격해올
기세라는 소식에 민종렬은 나주성 북쪽의 수성군을 급히 불러들이는
한편 일본군과 좌선봉장 이규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동시에 나주
수성군을 출동시켜 11월 18일 아침 고막원 동쪽 청림산과 호장산,
진등참 일대에 모여 있던 농민군을 공격했다
농민군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수성군이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하던 농민군들은 좁은 고막교를
한꺼번에 건너다가 많은 이들이 물에 빠졌다. 때마침 물 때여서 많은
농민군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농민군을 크게
무찌른 나주 수성군은 배후의 공격을 염려해 일단 나주로 돌아갔다. 그
뒤 11월21일 다시 포군 300명을 앞세우고 고막리 일대의 농민군을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들은 대포와 신식무기에 려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의 농민군이 다시 나주성 공격에 나선 것은 11
월 23일이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은 금안면 남산촌과 태평정
등지에 진을 쳤다. 나주성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까지 접근했다.
함박산까지 접근했던 농민군은 이날 밤 남산촌까지 물러나는데 그
이유는 농민군과 관군 사이의 증언과 기록에 차이가 난다.
농민군 쪽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날 밤 추위가 너무 심해 농민군이
물러났다고 했다. 관군 쪽 기록은 이날 밤 나주 수성군 막사에 불이
났는데 이 불이 화약이 쌓여져 있는 곳까지 번져 마치 대포를 쏘는 듯한
소리가 나자 농민군들이 이 소리를 관군이 대포를 쏘는 소리로
알아듣고 멀리 퇴각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11월 24일 수성군 도통장 정진석은 남산촌의 농민군을
급습했다. 농민군은 소를 잡아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날 죽은 농민군의 수만 35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더 이상 나주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너무도 많은 농민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성군들의 전력은
강했다. 농민군들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더 이상의 공격은 큰
피해만 불러올 뿐이라고 판단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농민군과 함께 후퇴했다. 몇 차례의 공격이 참패로
끝나자 수만에 달했던 농민군 수는 수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전세는
비관적이었다. 관군의 추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농민군을 이끌고 덕산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진로를 모색했다. 손화중은 11월27일 광주로 돌아가 광주관아에
머무른다. 덕산에 동민군이 온 과정이 이랬다.
농민군의 세가 약해져 더 이상 항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손화중은
12월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집강소를 떠났다. 손화중은 고창군
길마재에 있는 이모씨의 제실(祭室)에 숨어 지내다 12월 11일
주민들에게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졌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돼
1895년 3월30일 새벽 전봉준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 벽송마을 전투와 최경선의 최후
최경선은 22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동복으로 향했다. 비교적 산세가
험한 동복 일대에서 자리를 잡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경선은 12월 3일 나주 인근의 남평현 관아를 점령했다.
동학군은 남평수령의 인부(印府)를 빼앗았다. 현감 이희화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남평현이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초토사 민종렬은 나주의 관군과 수성군을 보내 화순, 능주, 동복
일대의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을 토벌토록 했다.

최경선을 비롯한 농민군들은 사평을 거쳐 벽송마을로 들어와
관군과의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농민군에
불리했다. 무엇보다 농민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날씨도 매우
추웠다. 농민군은 벽송마을 곳곳의 민가에 들어가 잠을 청하거나
쉬면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었다.
12월 3일 밤 벽송마을로 관군들이 고 들어왔다. 기습을 당한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무기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벽송마을에 머물던 농민군 157명이 그날 목숨을
잃었다. 63명은 포로로 잡혔다. 최경선은 그날 잡혀 일본군에
압송당해 뒤에 처형당했다. 사로잡힌 농민군 대부분이 사형에
처해졌다.
해온이는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처절했던 전투 상황을 보니 잠시나마
몸을 추스렸던 덕산이 너무나 힘들었던 전투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평안을 주었던 안식처을까 생각해본다. 동학의 꿈은 결국 이렇게
마무리되었던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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