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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3 [만귀정과 장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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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9-12 조회수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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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3 [만귀정과 장창우]

올 여름은 예년에 없던 뜨거움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숨을 쉴
때마다 들숨에 려들어오는 열기를 막을 수 없다. 에어컨을
켜놓은 방에서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 겁날 정도다.
창밖으로 손만 내어봤다. 팔뚝 피부를 타고 금세 뇌리까지
열기를 전한다. 얼른 창문을 닫는다.
해온이는 올 여름이 너무 지독하다 싶었다. 지난 수천년을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이번 여름은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갈 곳은 아마도 여기밖에 없을 듯싶다. 시원한 바람이 절로
분다는 정자이다. 사방으로 트여 있는 정자는 뜨거운 햇빛도
가려주는가 하면 살랑거리는 바람이 분다치면 열기도 바람따라
흩어지리라 생각이 들었다. 마룻바닥에서 느껴지는 나무의
질감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실바람도 여름더위를 한껏
식혀주기엔 적당할 것이다.
해온이는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 있는 만귀정(晩歸亭)을
찾았다. 지금 있는 정자는 1934년에 중건하고, 1945년에
고쳐지은 건물이다. 원래 건물은 언제 지었을까. 이곳에 정착한
효우당 장창우(1704~1774)의 가족이 동하마을에 살기
시작한 뒤로 지어진 건물임이 분명하다.
해온이는 만귀정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았다. 투박한 나무들이
바깥으로 서까래를 만들며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때는 1760
년이었다. 아, 이때는 국에서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이 태동하던 시기다.

■ 서당 만들기 마을회의
동하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회의를 열고 있었다. 흥성장씨 14
세인 장세 어른이 가운데 앉았다. 흥정장씨 13세인 장익한
어른의 아들 6형제 가운데 넷째다. 할아버지 윗분들은 그동안
지한면 사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장창우의 부친인 장세
어른이 1750년께 이곳으로 옮겨왔다. 너른 서창 들녘과
극락강에서 산강으로 연결되는 뱃길이 연결되는 양지바른
터전이었다.
이날 시끌벅적한 회의의 주제는 마을 서당을 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0여 가구가 모여 살다보니 아이들도 제법 북적
거렸다. 사자소학을 배워야 할 아이들이 20여명에 이른 데다
사서삼경을 읽어야 할 아이들도 10여명이 넘었다. 30여명의
어른들이 모인 마을 회의는 바로 서당을 만들고 누가 가르칠 것인
가다.
서당이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지만 어느 땅에 서당을 짓고
누가 가르칠 것인가, 돈을 부담하는 날파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르자 시끄럽던 마을 회의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넉넉한 처지가
아닌 터에 돈을 내는 일이 쉽지 않아서다.
이 때 장세 어른의 아들인 장창우가 나섰다.
“모두들 힘드신데 아이 있는 집과 아이 없는 집들 사이에 돈을
같이 내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당 정자를 짓는 데
울력을 거들어 주시면 나무를 사는 일에는 제가 아버님과 함께
나서겠습니다. 중요한 일은 어린 학동들이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지요. 가르치는 것도 제가 할 터이니
염려치 않았으면 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가 쏟아졌다. 여러 곳에서 “그러면
좋지요.” “사실 효우당이 나서길 내심 고대했어요.” “이제 우리
동하마을이 큰 걱정 덜었네요.”라는 말들이 이어졌다.
장창우의 호는 효우당(孝友堂)이다. 부모로부터 조상 대대로 그
자손들에게 지키도록 가르쳐 주는 집안의 가풍을 착실히 배웠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도 바르게 배웠다. 논어
위정편에 ‘효우(孝友)’라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해온이는 이
부분을 찾아 읽었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여쭈었다. 선생님은 왜 정치를 하지
않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서경에 이르기를, 효도하라, 마땅히
효도하라, 형제에게 우애로워라, 효제를 정치에 반되게 하라.
이것이 정치함이다. 어찌하여 따로 정치를 해야 하겠소.”(或謂孔
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
亦爲政, 奚其爲爲政.)
해온이는 결국 공자가 말한 효는 곧 정치이며, 공자가 말한
정치는 덕치이며 예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뜻에서 장창우는
마을 어른들에게 효도하는 일과 아이들에게 우애로운 일이 바로
서당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나서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다.

마을 사람들을 마을 입구 장창우네 너른 땅에 서당을 짓는 일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서고 마실 나서는
길에 옴서감서 힘을 보태다보니 어느새 초막 지붕을 덮기까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서당이 지어졌다. 낙성식 날에는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지금처럼 8월이었지만 무덥지 않았고 에어컨이
없어도 정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해온이도 슬그머니 정자에
앉아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린 학동들이 날마다 아침이면 정자에 모여들었다. 정자에 앉아
‘사자소학’을 펴고는 장창우가 선창을 하면 큰 목소리로 따라
했다.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아신(母鞠我身)하도
다.” 아버지는 내 몸을 낳게 하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다는
말이다. “부모호아(父母呼我)하시면 유이추진(唯而趨進) 할
지어다” 부모님이 날 부르시면 빨리 대답하고 달려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장창우는 학동들이 제비새끼들마냥 입을 내고
합창을 하면 어미 제비가 모이를 주듯 얼른 설명을 해주었다.

■ 연꽃 향기 피어나는 동하마을
동하마을은 마을 뒤로 개감산(개금산)과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다. 건너편에는 서창들녘이 펼쳐져 있다. 가운데로는 산강의
젖줄인 극락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 마을이 길지라고 말한다.
멀리 동쪽에는 무등산이 훤히 보이며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항상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동네 앞에 우뚝 솟은 백마산이 자리한
것을 더하면 말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맥에 둘러싸인 구릉에
포근히 자리 잡은 마을이다. 백마산은 용력의 정기를 내뿜어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근면하고 성실하며 발랄하고
씩씩했다.
남쪽에는 극락강이 유유히 흐르면서 마치 선경을 보는 듯
한가로운 듯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보다.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는 이들의 노랫소리는 정감이 듬뿍 들어 있었다.
오늘날 서창 만드리가 유명해진 데는 바로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정신과 울력의 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송정에서 밤마다 밝게 비치는 불빛으로 야경이 별천지 같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조선 초기만 해도 전라병마
절제사의 병이 있었던 내상(內廂)면 지역이었다. 내상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군사들이 주둔하는 병을 말한다. 군사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곡창지대를 지키던 곳이다.
병을 중심으로 한때 꽤 번창한 큰 마을이었다.
1397년부터 1417년까지 20년 동안 전라병이 주둔하다가
병이 강진으로 옮겨간 후로 다소 위축되긴 했으나 한번 형성된
마을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되었다. 그 뒤로는 고내상이라 불고
오늘날의 송정동 250-4번지 일대에 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동하마을 앞에는 연꽃이 화사하게 피어나 눈을 부시게 할
정도다. 연꽃의 짙은 향기는 지나가는 이들의 코끝을
자극했다. 해온이는 마을 이름을 동하(洞荷)라고 부르는 데는
이런 연유인 듯싶었다.
만년의 효우당은 학당을 열어 후진을 양성했다. 이웃 고을들의
선비를 초청하여 자연을 노래하고 경학을 토론했다. 이런 이유로
만귀정시사회가 생긴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마을의 풍속을
살피고 잘못된 부분은 고쳐나가는 일도 쉼 없이 하다.
장창우는 만귀정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로 시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붓을 들고 귀를 써내려갔다, 막힘없이 팔경의
모습이 그려졌다. 오늘날 서구8경의 토대가 되는 싯구다.
마을 사람들은 장창우의 팔경을 마치 노랫가락마냥 농사를 지을
때나 논일을 나갈 때도 흥얼거리며 지냈다. 동하마을 개감산에서
바라본 인근 풍경을 스스로 즐겨하는 노래다. 해온이도
슬그머니 노래를 따라 불러보곤 했다. 이렇듯 모두 즐거워하며
지냈고 학동들도 웃는 얼굴로 공부를 했다. 장창우의 서당은
그렇게 힘을 냈다.

■ 의친왕 휘호로 된 식재
효우당 장창우는 성품이 총명하고 양친을 효도로 모셨다. 어느 날
어버이께서 병환에 드셨다. 정성을 다해 모셨으나 천운이 다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상을 당하여 슬픔이 너무 큰
아름이었지만 장례 절차는 철저하게 의식에 따라 행하다. 장례
후에도 장창우는 3년간 시묘를 하다.
장창우가 하루도 눈물이 마른 날이 없었고 시묘한 자리는 풀도
자라지 않았다. 깊숙한 산속이었지만 장창우의 효성에 감동한 한
호랑이가 여막 주위를 호위할 정도다. 사람의 일로는 여겨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까닭으로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지방
사림에서는 다투어 칭찬했고 훌륭한 행적은 묻히지 않고 광산
읍지와 삼강록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해온이는 미루어 짐작컨대 서창의 유명한 의로움의 상징 인물인
눌재 박상(1474~1530)이나 회재 박광옥(1526~1593), 삽봉
김세근 장군(1550~1592), 절봉 김극추(1552~1610) 등의
기운이 장창우에게 충분히 향을 끼쳤다고 생각했다. 만귀정은
장창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공부하며 지켰다.
해온이는 이런 선조들의 모습을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수백 년
전의 세상을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디닌 듯 했다. 눈앞에 보인 것들이
꿈이 아닌 현실 같았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의 읽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그 뒤로도 흥성장씨 일문이 서창의 한 뿌리를 형성하며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선조의 유품을 모시고 경모하여 선대의
유업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화개산 남쪽 언덕 장씨의
선산에 흥성장씨의 풍속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서구 매월동
전평제가 있는 부근이다.
선조의 묘소에 대한 외관을
갖추기 위해 다 같이
제향을 모실 집을 짓기로
했다.
도끼로 깎고 톱으로 썰어서
중국의 신보와 조례에서
나오는 나무에 버금가는
최고의 소나무 재목을
사용하고 중국의 이루나
공수처럼 이름난 목공에
견줄 뛰어난 목공들을 모셔다가 재실을 신축했다. 상량문은 현와
고광선이 썼다. 지극한 정성을 들여 1929년 5월 완성되었다.
효우당 장창우의 행적 이후 한 집안의 본보기만 아니라 대대로
오래 계승하며 모범으로 삼기로 했다. 의친왕이 이같은 행적을
살펴 감탄하고 특별히 권장하는 뜻에서 재실의 편액을 ‘
식’이라 하고 직접 휘호를 하다. 재실의 이름은 식재(永式
齋)로 한 연유이다. 만귀정에서 동하마을을 가로질러 백마산을
살짝 끼고 돌아 서창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로 따라가면
식재까지는 20여분 걸린다.
식재 기둥에 걸린 8개의 주련은 재실을 찾는 이나 후손에게
교훈을 주는 들이었다. 해온이는 주련 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 내려갔다. 꽤 어려운 한자가 있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필기인식기에 씨를 그림 그리듯 해서
찾아봤다.

■ 만귀정에 깃든 이야기
만귀정은 한말과 동학 등 다소 어지러운 세상을 겪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서당으로서 역할도 시들해져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식재에 의기를 모은 흥성장씨 일문들이 모여 이번에는
만귀정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를 가졌다. 해온이는 이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게 하여 1934년 옛 서당을 지을 때처럼 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동하마을 입구에 땅을 파고 연못을 만든 다음 파낸 흙으로 동산을
만들어 정자를 창건했다. 장창우의 7세손인 대섭, 안섭, 흥찬(정섭),
일환, 창섭 등이 나섰다.
앞면 2칸 옆면 2칸 팔작지붕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동, 서,
남쪽의 3방향에는 난간을 돌렸다. 정자 안쪽에는 중건상량문을
비롯해 중건기, 중수기, 만귀정원운과 팔경 등의 시문현판 23개가 걸려 있다.
만귀정 판액은 암사(嵓史) 윤희상(尹喜祥)이 썼다.
해온이는 만귀(晩歸)의 뜻이 궁금했다. 효우당 장창우가 자신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귀(詠歸)의 뜻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했다. 1934년 고광선이 쓴 중건기에는 ‘그 이름을 만귀라
한 것은 만년에 이곳에서 노닐며 한가히 풍류를 즐긴다’고 밝히고 있어
만귀의 정확한 어원을 짐작할 수 있다.
고광선이 만귀정 중건기를 작성한데 이어 같은 해 이병수가 중건
상량문을 기록했다. 고광선은 중건기에서 옛 이름을 찾아 다시 붙인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아 높은 업적으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근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일부 부족한 부분은 1945년에 마무리했다. 중수기는 후손인 묵암
장안섭이 기술했다. 장안섭은 중수기에서 당시 국난으로 일을 마치지
못했으나 해방 이후 여유가 생겨 대목장 김이동과 보좌격인 조정석,
장한섭 등이 마무리를 도와주었다고 했다. 중수기문에 쓴 이
오늘에도 새롭다.

만귀정이 중건되자 이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호남
지방에서 시를 쓴다는 선비들이 모여 교유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만귀정시사회가 만들어졌다.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
亭詩社創立記念碑)를 통해 당대 시인 묵객들이 방문해 시를 짓는 등
풍류와 한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해온이는 어떻게 만귀정이 시인들의 장소가 되었는지 흥양 송광세가
쓴 기념비의 비문을 읽어보니 대강 이렇다. 장창우의 옛 터에 후선들이
정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박창환이 정자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야기하며 결사의 듯을 밝혔다. 당시 시를 좋아하던 선비로 박장주,
이회춘, 김병권, 박하형, 조병희, 이석휴 등이 봄철에 한 번씩 모아 시를
읊기로 했다. 이 때가 1939년이었다.
전 조선대 교수인 시인 김종(金鍾, 1948~ )은 만귀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 만귀정시사회 결성
만귀정에 이어 장안섭은 운치를 더하기 위해 연못 중앙으로 다리를
만들어 습향각(襲香閣)을 지었다. 시사회가 결성된 이듬해 사방 1
칸으로 지은 정자로 ‘연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만귀정의 별당이다. 장안섭이 지은 ‘습향각원운’에는 옛 추억을
기리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墨庵精舍)는 사방 한 칸의 팔작지붕이다.
송정읍장을 지냈던 장안섭의 덕행을 기려 1960년 광산군민과 친척,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해온이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위해
돈을 모아 정자를 짓도록 한다는 일이 당시에 쉽지도 않았을 터인데
깜작 놀랐다.
장안섭이 쓴 유거기(幽居記)에는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고향
친척과 친구들이 자신의 만년 휴식을 위해 지은 것이라 했다. 이런 휴양
장소를 얻게 되니 감격스럽고 부끄럽다고도 했다. 멀리서 찾아온
벗들을 만나 회포도 풀고 친척들이 모여 살뜰한 정당도 나누며 늙은
만년에 자신의 심성을 기르는 것이라 여겼다. 마지막에 이 정자를 길이
보존해주기를 바람으로 했다. 장안섭이 쓴 묵암정사원운은 다음과
같다.

묵암정사 안에는 기장산하(氣壯山河)라는 편액이 있다.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7)가 썼다. 윤용구는 조선 후기에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도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한 인물이다.
이렇게 만귀정으로 시작된 정자는 연못 중앙을 가로 지르며 일렬로
지어졌다. 참 재미있는 구조이다. 만귀정 근처에는 왕버들 나무가
우거져 있고,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건너가는 다리 옆에 한 쪽은
취석(醉石)이, 다른 쪽에는 성석(醒石)이라는 자가 새겨진 석재가
놓여 있다. 이 의 의미는 ‘들어갈 때는 술에 취하더라도 나올 때는
술에 깨어 나오라’는 것이다. 해온이는 이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다.
선비는 언제나 몸가짐을 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들어가는 목교에는 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허리를 숙여 통과해야 한다. 마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나무가
가르쳐주는 듯하다. 만귀정은 1984년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정되었다.
한때 이곳은 광주사람들의 소풍장소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졌고,
여름이면 창포꽃이 땅바닥을 뒤엎었고, 가을이면 연못가에 붉게 물든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었다. 봄(벚꽃)과 여름(창포꽃), 가을(상사화),
겨울(설경) 등 사계절과 조화가 잘 이뤄져 서구 8경 중 한곳으로
꼽힌다.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한때 스크린을
호령했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화 ‘꽃상여’와 ‘탈선 춘향전’이
이곳에서 촬되기도 했다. 해온이는 이런 곳이 요즘은 좀 아쉽다.
인근에 새로 집들이 들어섰는데 전통마을과 만귀정을 생각한다면
외관 모습이라도 한옥 형태를 갖춘 집이었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해온이는 나중 집을 짓는다면 마을과 어울리며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공간 속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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