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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8 [상무대와 군분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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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6-14 조회수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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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8 [상무대와 군분면의 역사]

■ 한반도의 봄과 겨울, 그리고 상무대
해온이는 과거 수천 년 세월동안 이 땅위에서 벌어진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목도했다. 각종 오욕과 광스러운 일들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벌어지고 이에 따라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결정됨을 보았다. 돌이켜 보건데 이 땅위에는 평화로운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았던 듯싶다. 그보다는 수많은 전쟁과 다툼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이 땅위에 벌어지고 있는 다툼과 살육은 크게 두 가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는 권력욕이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마음, 그
권력욕과 정벌 욕이 수많은
전쟁을 초래했다. 다른 하나는
이념이었다. 내가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그 반대의 경우에 사람들은 칼과 총을 들었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어지러웠다. 지금 세월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해온이는 최근 변화무쌍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적
계절’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가 몹시 궁금하다.
최근 몇 년 동안 한반도에는 삭풍이 불었다. 핵무기를 앞세운
북한 정권은 시도 때도 없이 남한을 위협했다. 남한은 전전긍긍
했다. 불안한 세월이 오래되다보니 긴장감이 무뎌지기도 했지만
전쟁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은 한반도를 ‘
지구의 화약고’라 불다. 지난해는 전쟁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지난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에 훈풍이 불어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해온이는 이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반도의 정치계절은 봄이 됐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듯싶었다.
그러나 이런 봄날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겨울날씨로 변하더니 금세 다시 이를 녹이는 훈풍이
몰아치는 등 급변했다.
미국과의 막후 협상과정에서 심기가 비틀어진 북한이 지난 5월
16일 이후 미국 측을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이 북한정권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은 채 모든 핵무기와 핵기술을 폐기하라고
몰아붙인 것이 원인이었다. 백기투항하면 돕겠다는 미국 측의
요구에 북한 정권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그 반대의 시각도
있다. 북한정권이 핵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선수를 치며 그들의 진정성을 간파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이다.

마침내 5월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
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6월 12일로 예정돼있던 북미
회담을 전격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북미정상회담 취소결정으로
한반도의 정치계절은 다시 혹한이 돼 버렸다. 하지만 북한은 그
다음날인 25일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담화를 통해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다소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다. 해빙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러더니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으로 문재인 대통령과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5월 26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겨울과
봄을 오가는 한반도 모습에 모두들 긴장감을 갖고 들여다보고
있다 해온이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이 땅이
평화로운 땅이 됐으면 하고 또 바랬다.
그리고 과거 군 교육시설 상무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지금의
상무대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상무대가 안고 있는 그 오욕의
역사를 새삼 돌이켜 보았다. 과거의 상무대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군사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남북 간 군사대결을
위한 전투인력을 양성했던 곳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장소다.

■ 우리역사의 축약지(縮約地), 상무대(尙武臺)
광주 상무대만큼 우리역사의 진행과 굴곡을 축약하고 있는 곳이
없다. 상무대는 후 삼국 시대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인 곳이다. 상무대와 인접해 있는 지금의 송정리 비행장
일대는 조선시대 전라병성이 있던 장소다. 상무대와 사월산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에는 5만여 명의 북한군 포로가 수용돼 있던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광주 치평동 일대에 군 교육시설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
년 10월,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가 육군교육총감부가
되면서 광주로 옮겨져 왔다. 또 진해의 포병학교와 부산의
통신학교가 광주로 이동해 1952년 1월 7일 3개병과 군사
학교인 상무대가 발족됐다. 광주 상무대는 이후 더욱 확대됐다.
전체 부지가 60여만 평에 달했다. 상무대는 광주경제와 문화를
맡은 한 축이 됐다.

1960년 대 상무대는 우리 군의 초·중급 간부들을 양성하는
핵심교육시설이었다. 1960년 6월 상무대는 전투교육사령부가
됐다. 16개병과 중 5개 전투병과 장교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일선부대 지휘자로 나갔다. 가장 많은 초급반 장교를 양성한 병과학교는 광주보병학교 다. 임관한 육사·학군(ROTC)·3
사관학교 장교들이 4개월 동안 보병학교에서 각종 전술학을
배우고 지휘통솔능력을 키운 뒤 일선부대로 배치됐다.
60~70년대 광주보병학교 초급반 장교들이 외출과 외박을
나오는 주말이면 광주 충장로는 소위 계급장을 단 초급장교들로
가득 찼다. 음식점과 술집, 숙박업소등은 상무대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보병의 경우 중대장 보직을 앞둔 대위급 중견간부들이
고급 군사반 교육과정을 상무대에서 마쳤다. 다른 병과 고급반
장교들을 포함해 해마다 3만 여 명의 장교들이 광주에서 최소한
4개월에서 6개월을 생활하다 임지로 떠나곤 했다. 지금까지
모두 80여 만 명의 장병들이 광주에서 교육을 받고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금 40대 후반의 장교출신 일반인들에게 광주는 아련한
향수가 있는 도시다. 광주는 그들에게 젊은 시절의 추억과 함께
같이 떠올려지는 도시다. 청춘의 희망과 야망, 그리고 사랑에
울고 웃던 추억이 생생한 곳이다. 상무대가 지난 1994년
장성으로 옮겨져 버린 뒤 땀을 뻘뻘 흘리며 군사훈련을 받던 그
연병장과 막사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상무대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추억의 공간이다.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상무대는 광주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하던 곳이었다. 광주시민들이 덕을 많이 봤다. 상무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기름과 각종 물자는 광주경제를 기름지게 했다.

장병들이 지갑에서 내놓는 돈은 광주학생들의 학자금이 됐고,
광주사람들의 살림밑천이 됐다. 건실한 청년장교와 마음이 맞아
타지로 시집을 간 광주처녀들도 많았다. 전국 곳곳에 광주가
친정인 50~60대 여성들이 꽤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1980년 5·18은 광주시민과 상무대가 결별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광주와 상무대는 함께 웃고
울던 ‘공동체’다. 광주에 큰 행사가 있으면 상무대 군악대와

장병들이 나서 함께 즐거움을 나눴다. 1960년대 조선대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는 상무대 공병대 장병들이 나서 큰 힘을 보탰다.
가뭄이나 수해가 나면 궂은일을 뒤처리해주곤 했다. 그런
상무대지만 1980년대 상무대는 광주시민들에게 공포의
장소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은 상무대를 ‘
광주시민을 무력 진압하는 지휘본부’로 사용했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을 붙잡아와 가둔 뒤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해온이는 이때부터 친근했던 상무대가 공포의 장소로
변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 뒤로 상무대는 광주시민들이 시선을
돌리는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상무대가 지난 1994년 장성 삼계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15년
동안 광주와 상무대는 유리된 상태로 동거했다. 결혼생활로
비유하자면 ‘별거상태’나 다름없었다. 상무대에 대한 추억은
세대마다, 지역별 계층마다 서로 다르다. 60세에 가깝거나 넘긴
이들에게 상무대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그래서
과거 상무대 입구가 있었던 곳에 놓인 표지 석에는 백발의
노신사들이 가끔 서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무대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추억을 그려보는 이들이다.
이들은 먼 곳에서 버스를 타고 오거나 차를 몰고 온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광주 상무대의 추억’을 좀 더
생생하게 안겨줄 수 있는 시설이나 기념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도 관광자원이기 때문이다.
40~50대에게 상무대는 고통과 회한의 장소다. 5월 광주의
아픔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군사시설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는
30대 이하의 사람들에게 상무대는 환락과 유흥의 장소일
뿐이다. 지금 상무대는 두 얼굴의 공간이다. 낮이면 오피스
타운이지만 밤은 불야성을 이루는 환락의 장소다. 과거 상무대의
밤은 고된 훈련에 지친 초급장교들이 단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상무대 밤은 젊음을 만끽하기위해 청춘남녀들이 잠을
자지 않고 즐기는 시간이다.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 후 삼국 때의 상무대
과거 상무대 역사를 더 더듬어보기 위해 해온이는 광주의
향토사학자로 유명한 김정호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선생님은
남구 양림동에 살고 있었다. 선생님은 광주의 역사를 정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생은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다. 전남지역 섬 문화와 역사를 정리하는데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왔다.
최근에는 광주지역 곳곳의 역사를 내히 들춰보면서 잊힌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다시 묶고 있다. 선생의 고증과 필력은
대단하다. 그래서 선생의 필력이 가는 곳이면 꿈틀꿈틀 그곳의
역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해온이는 선생님이 말하시는 상무대 옛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다. 상무대란 이름은 1952년 1월 6일부터 시작됐다.
상무대는 조선 시대에 군분면(軍盆面)으로 불렸다. 군분은 ‘
군대를 담아두는 옹기’라는 뜻이다. 지금의 상무대 일대는 옛날
옛적 후삼국 시대 진훤과 왕건의 군사패권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
광주지도에 는 황계면(黃溪面)에 진훤대가 표기돼 있다. 진훤대는
진훤이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진훤의 군사와 전투를 벌던 왕건의 부대는 광주 서구 벽진리
사월산(대동여지도 표기)에 배치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치하고 있는 진훤과 왕건의 부대 중간 지점이 군분면(상무대
지역)이었고 이 곳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토호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왕건은 산강을 통해 병력과
물자를 실어와 사월산 일대에 진을 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시대 군분면이 광주시 치평동이 되다
조선시대 군분면에는 열 두 동네가 있었는데 그 마을들은 지금의
농성동에서 치평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분면은 극락(極樂)면의 쌍촌, 치평, 화정, 내방의 네
동네로 통합됐다. 상무대는 군분면 절반과 산강변에 있던
내정면(內丁)전체가 합해진 곳이다. 지금의 상무대에 있었던 옛
동네는 내정면 신촌, 평촌, 하촌과 군분면 택동, 쌍촌, 노치, 내동,
계수 등 일곱 동네다.
상무대의 행정명칭인 치평동의 치평(治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분면 노치의 ‘치’ 와 내정면 평촌의 ‘평’을 한자씩 따와
합친 것이다. 이 때 당부면에 속했던 마륵리가 치평동에 포함됐다.

군분면 택동에 속했던 지금의 가톨릭대학 일대도 당시에
쌍촌동으로 편입됐다. 쌍촌동은 쌍촌과 내동, 택동 및 운천저수지
곁의 효사리까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광주광역시 청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조선시대 계수리라 불렸던 곳이다.
상무대는 군사시설 이름으로 행정동 명칭은 아니었다. 그런데 1961 년 쌍촌·치평·화정·내방동 등 4개 법정 동이 합해지면서
상무동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상무동은 1975년 쌍촌동과
화내동으로 나뉘어졌다. 1983년 화내동은 다시 화정 1,2동으로
갈라졌다. 1990년 인구가 늘어나면서 화정 2동에서 화정 3동이
생기고 후에 4동도 나왔다. 쌍촌동은 1993년 상무대군사시설이 옮기기 직전 상무 1·2동으로
나뉘어졌다. 군사시설은 모두 사라졌지만 광주사람들은 예전의 그
땅을 여전히 상무대라 부르고 있다. 먼 훗날 사람들은 오피스 건물과
유흥업소가 즐비한 치평동을 왜 군사와 관련이 깊은 ‘상무대’라 부르는지
의아해할 지 모른다. 상무 1·2동 주민들 역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 이름이 어떤 연고로 ‘상무’인지를 헤아리지 않고 무심히
살아갈 것이다. 해온이는 이런 역사적 이야기를 들으며 나중에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잘 알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 일제강점기 때의 상무대
선생님은 이어 또다른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1897년 목포개항을
전후로 해 광주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일본인들은 양림동 광주
천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광주에 들어와 일본인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닦은 사람은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이었다. 엔싱은
일본불교를 포교하는 승려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커서 살
곳을 구할 수 없자 엔싱은 인연이 있던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에
도움을 청했다.
윤웅렬을 통해 광주 서문 밖(지금의 광주시 동구 불로동 1번지
일대)에 거처를 구한 엔싱은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광주로 불러
들다. 엔싱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목포를
거쳐 광주로 건너왔다. 이오코는 곧 둘째 딸 미츠코와 사위
세쓰타로를 광주로 오게끔 했다. 딸과 사위는 양잠에 능했다. 이들은
일본식 농업과 잠업을 보급하기 위해 광주에 실업학교를 세웠다.

오쿠무라 남매는 실업학교를 세우면서 일본인 목수와 건축
인부들을 부산과 일본에서 불러들다. 10명 미만이었던 광주의
일본인들은 1898년 실업학교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크게 늘어
100명을 넘어섰다. 일본인 수가 크게 증가하자 보작촌(洑作村)
일대에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생겨났다. 이
보작촌 유흥업소들은 지금의 황금동 일대 집창촌과 술집들로
명맥이 이어졌다.
일본인의 수가 많아지자 이오코 등은 일본인 집단촌락 건설을
시도했다. 이때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인 곳이 극락면 일대다.
일본인들은 북문 밖 장성으로 가는 길가에 울창하게 서 있던 유림
숲 일대에 1900년대 초반 극락촌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인 거주구역 조성계획은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조선
관리들에 의해 무산됐다.
일본인들이 극락촌 건설 적지로 꼽은 곳이 바로 지금의 치평동
일대를 포함한 과거의 상무대지역이었다. 상무대에 근대적 군사
시설이 들어선 때는 1937년이다. 일제는 남평들에 간이활주로를
만들어 군 항공기 이착륙에 사용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 전용비행장이 필요해짐에 따라 1937년 11월
극락면 계수리에 비행장을 신설했다. 당시 계수리 활주로는 지금의
서부경찰서와 전남고등학교 일대 부지에 놓여 있었다.
1945년 3월 일제는 광주 계수리 비행장에 광주 해군항공대를
편성했다. 이 때부터 광주해군항공대는 ‘요카렌’ 양성기지가 됐다.
요카렌은 일본해군 비행예과 연습생 혹은 해군 소년항공병을 일컫는
말로 일본해군이 태평양전쟁 말기 부족한 조종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급조한 공군조종사양성제도다.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조종사들 중 일부가 광주 치평리 요카렌 출신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징병을 실시했다. 일제가
조선인 청년들을 끌어와 훈련을 시킨 곳 중의 하나가 일제의
군사시설이 즐비했던 지금의 광주비행장 주변이다. 이때 일제는
미군의 폭격에 대비, 비행장 주변 사월산과 양림동, 소태동에 동굴을
뚫고 탄약과 물자를 보관했다. 진도와 신안 등 전남 남해안 주요 섬에
방공호동굴을 뚫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상무대 일대 일제의 군사시설은 광복 후 그대로 광복 후 한국군의
군사시설로 사용됐다. 일본군이 주둔했던 치평동 비행장 막사는 국군
제4연대가 들어왔다. 1948년 4연대는 제5여단으로 확대됐다. 1951
년 미군 공병대는 지금의 상무지구를 훈련장으로 개발했다. 동래의
보병학교, 진해의 포병학교가 이전할 수 있었던 기반시설이 마련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군사시설이 단초가 돼 동양최대의
군사교육기관이 상무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광주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해온이는
전혀 듣지 못했던 포로수용소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근대사에서
상무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이후 세대들은 역사책에서 배운 ‘거제
포로수용소’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광주에는 4개소에 북한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 했다.
전남의대 곁 간호학교자리와 상무대 경내(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
센터 건너편), 금호동 공군화약고자리 곁, 벽진동 사월산 자락 상촌과
벽진 동네 사이 개활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돼 운용됐다.
625전쟁 초기에 북한군 포로수용소는 부산과 거제도에 있었다.
그런데 1951년에 들어서 휴전협정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거제포로
수용소에 있던 13만 명의 포로들 사이에 좌우갈등이 시작됐다. 그래서
반공성향의 포로들을 가려 군사시설이 있는 광주와 대구, 논산 등지로
분산 수용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광주에도 1952년 4월 수용소가 생긴
것이다.
전남의대 곁 간호학교자리에 있었던 서석동 포로수용소에는 5만여 명의 포로가 있었다.
이곳의 포로들은 지리산·불갑산·추월산 가마골·화순 백아산·광양 백운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중상자나 부상자가 많아 치료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옆에 있는 곳에 수용소를 둔 것이다. 미군이 관리하던
북한인민군 포로수용소와 구분해 광주수용소로 불다.
또 한군데의 수용소는 상무대 안에 마련됐다. 미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다. 그런데 상무대 포로수용소에 수가 늘어나면서
금호동 공군화약고 옆과 벽진동 사월산 개활지에 수용소를 추가로 만들었다. 1953년 6월 당시 상무·금호·벽진 3개수용소 포로에
수용돼 있던 포로는 모두 1만610명이었다. 광주포로수용소는 1953
년 6월18일에 일어난 반공포로석방의 주요 무대중의 한 곳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 미국의 반대에 부딪치자 미군
관리하에 있던 반공포로 탈출을 비리에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헌병본부사령 임기택(林奇澤) 중령은 광주에 내려와
상무대 교육사령부 한석(韓錫) 소장과의 사전협의 아래 광주3
개수용소 포로들을 탈출시키기로 했다. 6월18일 새벽 2시 미군
포로수용서의 경비보조를 맡고 있던 한국군헌병들이 수용소를 밝히고
있던 조명등을 일제히 사격해 부숴버렸다.
수용소 포로들은 철조망을 부수고 탈출을 했다. 포로들은 수용소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뒤 인근
지역으로 도망갔다. 경찰들은 미리 민가를 확보해두고 포로들을
숨겨주었다. 이날 전국 6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한 포로는 2만
7천388명이며 미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포로는 61명이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인원은 1만432명이었다. 국내 전체
반공포로 2만7천388명 중 38%에 달하는 숫자다. 광주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상무대 일대는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픔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온이 이처럼 상무대가
일제의 조선침략에 따른 고통과 남북분단의 상처, 민주화과정의
처절함이 스며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한반도의 역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상무대를 찾아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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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1 [호남의 큰시장 양동] 2018-07-20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10 [마지막 뱃사공과 서창 주민들] 2018-07-03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9 [서창나루와 농선대시주비] 2018-06-25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8 [상무대와 군분면의 역사] 2018-06-14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7 [눈물바위 읍궁암과 고광선의 엄이재] 2018-05-16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6 [백마산과 김세근 의병장] 2018-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