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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5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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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4-26 조회수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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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

해온이는 오늘도 금당산 정상에서 서창 들녁과 산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해온이가 바라보는 풍경은 예전과 무척 다르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광주의 외곽이던 풍암제 일대는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다. 풍암제의 물을 받아 운리, 풍암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다. 수박등을 넘어 벽진과 남평으로 가던
옛 사람들은 풍암제 주변에 앉아 찰랑한 물과 금당산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곤 했다.
가을이면 풍년가가 흘러나오던 풍암제 주변의 논과 밭, 과수원은
이제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광주 남문에서 사창나루터로
이어지던 외길에는 대신 넓디넓은 대로가 놓여 있다. 인적 없던
산길에는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있고, 아주 가끔씩 농부들이
오가던 풍암제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매일 붐비고 있다.
무등산 줄기에서 흘러내려와 암과 강진, 나주 방향으로
물결처럼 이어지던 구릉은 파헤쳐지고 뒤집혀져 길이 되거나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해온이는 먼 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1872년께 군분면(軍盆面)
으로 불리던 곳은 지금의 쌍촌·화정·치평·상무·광천동 일대다.

이곳은 꽃밭이 지천이었던 곳이다. 넓디넓은 습지와
평지에 어찌나 많은 야생화와 풀들이 펼쳐져 있던지, 보는
이들이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꽃향기 역시 진동했다. 그래서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은 ‘향기 분(芬)’字를 사용해서 군분(軍芬)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꽃 대신 아파트가 천지다. 벽진동과 마륵동 일대는 당부면(當夫面)이라 했다. 서창·
금호동도 당부면에 속했던 곳이다. 이곳은 곡창지대다. 산강
지천이 지나치는 곳이라 땅이 기름졌다. 기름진 땅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라 곡식이 많이 생산됐다. 자연히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큰 동네가 즐비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동네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없으니 그리 된 일이다.
참으로 정겨운 풍경들이다.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외침(外侵)과
전쟁 속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되풀이됐던
중국 대륙의 세력과 왜구들의 침략은 이 땅을 피로 물들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강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가.

우리가 흔히 대하는 산과 강, 들판에는 우리 선열들의 피맺힌
함성과 눈물이 스며있다. 해온이는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구한말 이후로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던 농민들의 의로운
항쟁이 이 산과 저 들에서 분연히 펼쳐졌다.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국권을 유린할 때도 많은 이들이 일어나 창과
쇠스랑을 잡았다. 평생 만 읽었던 서생들과 땅만 일구었던
농민들이 총을 든 일본 헌병과 경찰에 맞서 싸웠다. 금당산에서
해온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곳에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충혼이 담겨져 있다.
해온이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 ‘통한(痛恨)의 산하(
山河)’에 담겨진 이야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벽진 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문득 백마산이 눈에 들어온다. 해온이의 시선이 절로
멈춰진다.
백마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두 기의 묘지. 아버지와 아들의
것이다. 바로 부자의병장(父子義兵長) 양진여(梁振汝)와 양상기
(梁相基) 의병장의 묘다.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백마산에 있는 두 기의 묘지. 그 내력을
모르면 무심코 지나칠 수밖에 없는 묘지다. 그러나 그 두 기의
묘지는 우리가 최대한의 예를 갖추고 찾아가고, 소중하게
여겨야할 곳이다. 그 두 묘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맞서
싸웠던 아버지 양진여와 아들 양상기, 두 의병장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매월동에서 서창 절골 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버스
회차지가 있다. 6·26·28·59번 버스들이 잠시 숨을 돌린 뒤
출발하는 곳이다. 회차지 입구에는 학산사(鶴山祠) 입구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다. 학산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삽봉 김세근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학산사 입구를 지나 자전거도로를 따라 서창 쪽으로 200여m를
가다보면 ‘순국부자 의병장 양진여 상기 묘소입구’(殉國 父子 義
兵長 梁振汝 相基 墓所入口)라는 비석이 서있다.
백마산 정상 쪽으로 100m 정도를 올라가니 두 기의 묘지가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넓고 양지바르다. 후손
양일룡씨 등이 힘을 모아 정비한 덕분에 이 정도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 이전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묘 좌측에는
동백이 찬란하다. 봄기운이 완연해짐에 따라 붉은 잎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나라가 쓰러져가는 모습에 피를 토하며
통곡하던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꽃이 반 정도 떨어져나가 모습은 비록 성기지만 꽃봉오리들은
여전히 찬란하다. 저 동백들 역시 주인들의 마음을 닮았을까?
땅에 수북 쌓인 동백 잎들은 선혈인 듯 유독 붉다.

광복이 된지 70여년이 지났으니 안온(安穩)해도 되련만, 동백은 대구형무소
에서 절명했던 주인들의 통한을 잊지 않고 있는 듯싶다. 그
주인에 그 동백이다. 우리들 역시 저 동백처럼 나라위해 숨져간
선열들을 잘 기억해야할 텐데…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안타깝게도 양상기 의병장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다.
아버지 양진여와 아들 양상기 의병장은 1908년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가 체포됐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 양진여는 1910년 5월 30일에, 아들
양상기는 1910년 8월1일에 각각 교수형에 처해졌다. 불과 두 달
간격이었다. 가족들은 양진여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양상기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 양진여 의병장
양진여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끝에
의병들을 모아 일제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양진여는 1908
년 음력 6월 중순 의병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30여명이
모여들었다. 양진여는 같은 달 하순 삼각산 죽청봉으로 의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출병식을 가졌다. 이날 양진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국(我國)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어 대소의 관리에 일인(日
人)을 임용하는 것은 자국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것으로, 그
원인은 현 정부의 대신 등 현직에 감(甘)하여 자국의 존망을
개의치 아니하는 것으로 의병을 일으켜 속히 현 대신을
무너뜨리고 이어 일인의 대소 관리를 살육하고 또 각지에
침입하고 있는 일본인을 퇴거시키고 독립국으로 복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동지를 모집한 까닭이다.”
일본의 앞잡이가 돼 조선을 넘기고 있는 친일파를 제거하고
일본인들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자는 것을 역설했다. 양진여의
목표는 의병 300명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 뒤 다른 의병부대와
힘을 합쳐 서울(京城)로 진격, 점령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에 이르러 의병수가 100
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의병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양진여 의병 부대의 주 무기는 화승총이었다. 거병 당시 양진여
의병부대가 보유하고 있었던 화승총은 모두 25정이었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광주를 근거지로 삼아 추월산 일대 담양, 창평, 장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8년 11월 14일 양진여 부대는 우편
체송인이었던 일본인 에또오를 살해했다. 당시 우편체송인은
단순히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본헌병과 경찰들의
작전계획이나 극비정보를 전달하는 정보기관원이나 마찬
가지다.

양진여 의병부대가 일본의 정규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는 1908
년 10월 26일에 벌어진 광산군 신촌 전투다. 이 전투에서
양진여 부대 의병 5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4정을 빼앗겼다. 100
여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20여명에 불과한 일본 토벌대에
일방적으로 린 것은 화력이 열세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5연발인 38식 아리사카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의병들이 사용하는 화승총은 부싯돌을 사용해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것으로
사격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시 발사를 하려면 최소한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에 반해 일본군들은 연발사격을 할 수 있는
데다 곧바로 재장전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기관단총
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쏘면서 기선제압을 하고 연발사격을
하면서 돌격해오면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일본군은 양진여 의병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1908년 11월 5일
제2특설 순사대를 편성해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광주를
비롯 장성, 광, 나주 지역을 1주일간이나 추격해오자 양진여
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구성해 담양
대치와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다.
1908년 11월 23일 오후 5시 광주군 대치(현 담양군 대전면
속리)에서 300여 연합 의병과 광주수비대 우다 특무조장이
이끌었던 16명의 수비대 간에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연합부대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에서는 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의병연합부대는 24일 오후 5시까지 하루 동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다음 추월산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추월산에는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끈 20명의 토벌대가
양진여 의병부대를 기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성 약수정
(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서 기동하기 시작한 야마다
토벌대는 추월산 정상에 모여 있던 의병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추월산 전투에서 15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추월산 전투를 계기로 해 양진여 의병부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이에 양진여 의병장은 1909년 2월 김재선과 이원오 등과 함께
연합의병부대를 구성했다. 양진여 의병장은 연합의진의 총대장
으로 추대됐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의 압박이 계속되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로 피신했으나 1909년 8월 26일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양진여 의병장은 체포된 후 아내를 불러 “거병 당시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해 진력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결코
유감이 없다”며 “목숨은 아깝지 않은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욕을
당해 죽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양진여 의병장은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1910년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이 집행됐다.
양진여 의병장은 제주양씨(濟州梁氏)로 고려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금성군 동재(棟材)의 둘째아들 도원수 한서(漢瑞)의 16
세손이다. 1860년 5월 31일 광주군 서양면 니동(光州郡 瑞陽面
泥洞, 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남중(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서암, 휘는 진(振永)이며, 자는 진여다. 부인
양박씨 순덕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양진여 의병장은 부인 박씨로 하여금 처가동네인 장성과 담양
일대 10곳에 주막을 열도록 한 뒤 의병자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는 부인 박씨의 친정이 있는 동네다.
벽진리는 부인 박씨와 그 두 아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들어가
살았던 곳이다. 양진여의 3남 1녀 중 장남인 상기(족보명 秉奇
)는 부친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돼 아버지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둘째는 필수(족보명은 秉洙)로 일제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26세에 후사 없이 죽었다. 셋째가 형들의 의병활동을 지원했던
공수(족보명은 秉公)로 양진여의병장의 대를 잇고 있다. 양진여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3년 유배형을 받은 동걸(字는 瑞 賢)은 양진여의 이복동생이다.
양진여 가문은 양진여·양상기 ·양필수 부자와 함께 양진여·양동골 형제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옥고를 치른, 충절가문이다.

■ 양상기 의병장
양상기는 의병장 양진여의 장남으로 1883년 10월 10일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군대던 진위대 병사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진위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광주
경찰서에서 순사로 근무했다. 아버지가 의병장인 사실이 알려져
1908년 4월 23일 광주경무서 순사 직에서 쫓겨났다. 부친인
양진여보다 두 달 앞선 5월, 4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일어섰다.

양상기가 순사 직에서 쫓겨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의병부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순사로 재직할 때 주도면하게 의병부대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순사 직에 취직한 것도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양상기 의병부대의 주축은 대한제국의 지방군이었던 진위대 출신
군인이었다. 양상기 부대의 도통장은 안판구로 진위대 조장(曹長
)이었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해
의병들이 80명 정도로 늘어났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의 복구(復
舊)’를 주장했다. ‘한국의 복구’는 일본에 협력[甘]하는 조선 관리를
제거하는 한편 각지에 있는 일인 관리를 살육해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상기 부대는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고자나 일제에 협력하는
일진회원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광주군 대치(大峙) 산사촌(山寺村
)에 있는 호계당(護溪堂)이라는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불태웠다.
또 창평군 동서면 동산동에 거주하는 고자 정건섭을 살해하기도
했다. 양상기 부대는 거병초기 일제에 매우 위협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08년 12월 22일의 동복 삼지촌(三枝村)전투, 1909년 4월
14일 동복군 외북면 서촌(西村)전투, 1909년 5월 17일 담양군 정면
덕곡리 전투 등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의병부대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다. 특히 덕곡리 전투에서는 양상기 의병부대 40여 명 중 23
명이 전사해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다.
이에 양상기는 의병부대를 해산한 후 전북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909년 12월 20일 남원군 통한방(通漢坊)에서 일제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고 만다.
일제에 체포된 후 양상기 의병장은 “벌써 운명이 자(玆)에 지(至)한
바에는 사(死)를 결(決)하다. 만약 생명에 이상이 없다면 다시
도당을 모아 폭거(暴擧)에 출(出)할 결심이라 한다”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양상기 의병장은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사건’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다.

■ 서암로와 설죽로
해온이는 이렇게 두 부자가 한꺼번에 의병활동을 하다가 사형
당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 내심
부끄러웠다.
양진여 의병장의 우국충정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손자인 양일룡씨가
1971년 우여곡절 끝에 부산교도소에서 보관돼 있던 ‘양진여
판결문’을 찾아내면서 부터다.
이 판결문은 1971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돼 관심을
모았다. 양진여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을 비롯나
, 등에 담겨있다. 순천대 홍기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이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에
대한 연구를 벌다. 광주 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노성태 선생 역시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에 대한 연구에 정성을 들인 분이다. 노 선생은 각종 자료·문헌연구와 현장답사를 통해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노성태 선생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지역역사를 정리하고 탐구하는데 정열을 바치고 있는 분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연구한 내용들을 지역 언론에 게재해
정리한 뒤 책자로 발간했다. 이외에도
등 주옥같은 책들을 펴냈다.
정부는 1977년 의병장 서암(瑞菴) 양진여와 설죽(雪竹) 양상기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각각 수여했다. 광주광역시는 양진여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동운고가도로에서 서방사거리까지의 도로를 서암로라고
이름 지었다. 또 양상기의병장을 기념하기 위해 신안 제1교에서 북구
일곡동까지의 도로를 설죽로라 명명했다.
해온이는 매월동 묘역과 서암로와 설죽로가 접하는 신안교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의 기개와
충혼을 만날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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