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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역사여행3 [밝은 빛이 비추인 곳, 운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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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3-19 조회수 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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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최 혁 지음
원고 도움 정인서
사진 도움 이현숙 정인서 최정부 서구청 조선대박물관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최 혁 지음
원고 도움 정인서
사진 도움 이현숙 정인서 최정부 서구청 조선대박물관

원효(元曉) 스님이 무등산에 머무르며 선정에 들었다. 평소에는
가까운 절에서 사람들을 만나 부처님 말을 전했다. 얼마나
절이 많았던 지 팔람구암자(八藍九菴子)가 있는 곳이라 했다.
무등산에는 기록으로 보면 개선사를 비롯하여 증각사, 삼합사,
삼일암, 금석암, 백천사 등 50여개가 넘는 절이 있었다.
원효 스님은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 있는 곳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원효암이다.
원효암은 서기 500년 무렵 신라 지증왕 때에 지어졌다. 원효
스님은 이보다 1백여년 뒤인 617년부터 686년 무렵 살아
계셨으니 원래 있던 암자에 원효 스님이 이곳에서 지냈던 곳으로
밝은 여겨진다. 원효 스님이 고승이 되자 누군가 이곳을 원효암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해온이는 지금의 원효사, 즉 원효암을 찾았다. 원효 스님의
기운을 느껴보려는 것이다. 원효사는 무등산 북쪽의 의상봉을
마주 하는 중턱에 있다. 절 바로 앞에는 높은 계단이 있고 양
옆으로 하늘을 뒤덮을 만큼의 우거진 대숲이 있다. 대숲을 지나
절을 행하여 가는 통로가 마치 하늘을 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어느 날 원효 스님이 선정에서 깨어나 보니 상서로운 기가 서쪽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원효
스님은 그 기운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제자인
보광 스님에게 말했다.
“보광(保光)아, 산 아래 저 멀리 밝은 빛이 보이는 데 평소보다
다른 빛인 것 같구나. 너에게도 저 빛이 보이느냐.”
덩치가 큰 보광 스님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스님, 어디쯤인가요. 제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 저기 서쪽을 바라보면 작은 산이 하나 있고 그 산 빛이
남다르게 빛을 내는구나.
몇 번 찾아보는 듯하더니 “아! 저기인가요. 산에 있는 돌이
유난히 하얀 빛을 띠는 것 같은 데 저 곳인가요.”
“그래, 그렇구나. 그곳에서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는 데 네가
언젠가 한번 가보아야 할 것 같구나.”
“네. 스님, 며칠 후에 시주 댁을 찾아갈 일이 있는데 그 참에
들려보겠습니다.”
“그래 한번 알아보고 오면 좋겠구나!”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원효 스님은 원효암 법당에 가부좌로
앉아 또다시 선정에 들었다. 스님은 한번 선정에 들면 몇날
며칠이건 그대로 앉아 깨달음을 구했다. 제자들도 이러한 원효
스님의 모습을 잘 알았다.
보광 스님은 얼마 전 원효 스님이 자신에게 말했던 일이
기억났다. 서쪽에 있는 작은 산을 들려보고 밝은 빛이 어디에서
나오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원효 스님이 선정에
들었을 때 얼른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루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보광 스님은
곧바로 짐을 챙겨 길을 떠났다. 해온이도 슬그머니 스님을 따라
나섰다. 보광 스님은 해온이가 뒤따라오는 줄 전혀 몰랐다.
그 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햇빛도 참 좋았다. 보광 스님은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을 조심해야 했다. 가끔
가파른 곳에서는 지팡이가 필요할 정도로 조심해야 할 곳도
있었다.
보광 스님은 시주 댁 처사님을 만나 쌀 한 말을 받아 걸망에
담았다. 좀 무겁기는 하지만 늘 들었던 무게인지라 등짐을 지듯
들었다. 보광 스님의 덩치에 비하면 그리 무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원효 스님이 말했던 곳으로 찾아갔다.
오늘날 광주천이라 말하는 개천을 몇 번 건너야 했다.
산에서는 잘 보이던 곳이지만 내려와서는 잘 보이질 않아
지나가는 이들에게 물었다. 서쪽에 빛처럼 환하고 밝은 바위가
있는 곳을 물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백석동’이라 말했다. 흰
백(白) 돌 석(石)으로 자를 쓰고 백석동이라 했다.
스님이 찾아갔더니 정말로 백석동에 있는 큰 바위에서 빛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원효암에서 보던 빛보다 더 밝았다. 스님은
이곳에서 온 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 바위의 기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스님은 저절로 큰바위를 향해 절을 하고
말았다.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처님을 바위
속에서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석동 인근에 있는 석공을
찾았다. 한 처사가 일을 잘한다고 했다.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처사가 말했다. “빛이 나는 바위는 험해서 함부로 손대면
안되는 바위랍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한 뒤에 응답을 들어야
하지요. 많은 사람이 기도를 했지만 지금껏 응답을 들은 이가
없답니다.”
보광 스님은 자신이 응답을 듣겠다고 했다. 그러자 처사는
스님을 응답을 받는다면 자신이 바위 속의 부처님을 꺼내드리고
스님의 제자가 될 터이니 받아만 달라고 조건을 이야기했다.
부처님 제자가 되는 데 석공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광 스님은 큰바위 앞에 움막을 만들고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말이 천일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기도를 했다. 한 번씩 기도를 할 때면 3시간여 걸렸다.
기도를 하고 나면 온 몸에서 땀이 후줄근 흘러내리곤 했다. 정말
정성을 다하는 기도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여러 차례 지나고 3번째 가을이 다 될 무렵 스님의 기도가
끝났다.
스님은 마지막 기도가 끝날 때쯤 선정에 들었다. 천일기도에 온
힘을 쏟은 탓인지 보광 스님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보다. 살도
많이 빠져 등뼈가 다 보일 정도다. 하지만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랜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명상에 들었던 모습을 닮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스님이 눈을 뜨더니 석공을 찾았다.
스님은 석공에게 부처님을 만났다고 말했다.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처사님, 바위 속 부처님은 넓적한 얼굴에
긴 눈, 우뚝 솟은 코와 두터운 입술, 길게 늘어진 귀, 목에는 세줄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는 등 특이한 형상의 얼굴에다 굵은
목, 벌어진 어깨, 결가부좌한 자세로 계시네요.”
석공은 웃으며 말했다. “부처님은 다 그렇게 생겼지 않아요.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뜨고 있지요.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특징이 다보이지요.” “네, 그랬어요.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머리카락은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인데 윗부분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자리하고 있지요.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
肩偏袒)이나 의습은 발을 덮어 내리고 옷주름이 있어요. 수인은
아랫배에 양손을 마주 하여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어떤 물체, 마치
보주(寶珠)를 덮어 쥐고 있는 듯 했고 빛이 나오는 듯 외곽에
둥그런 선이 새겨져 있기도 해요. 뒤로 있는 광배(光背)는 한
줄의 신광(身光)과 세 겹의 두광(頭光)이 있고 가장 안쪽 두광에
연꽃무늬가 새겨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어요. 세 겹의 두광은
부처님의 머리에서 빛이 나와 퍼지고 있는 것 같아요.”
보광 스님은 자신이 선정에 들어 본 부처님의 모습을 모두
이야기했다. 석공 처사는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개를
끄덕다. 부처님의 모습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석공 처사는 곧바로 큰바위 속에 계시는 부처님을 꺼내는 일에
들어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바위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눈을 잘 뜨기 어려웠다. 망치와 정으로 바위에 댈 때마다 빛은 더
강하게 나곤 했다.
석공은 열심히 일을 했고 스님도 옆 움막에서 기도를 더 했다.
해온이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몇 개월이 지나 부처님을
찾아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커보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커 보이긴 했지만 근엄한 얼굴 표정과 안정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부처님의 손(手印)을 보니 다섯
손가락을 편 양손의 모습이 비로자나부처님이 자주 취하는
선정인(禪定印)처럼 보인다.
이 부처님이 있던 큰바위는 높이가 4미터이고 길이가 5.6미터에
달하고 부처님은 앉아 있는 모습이 높이가 2미터이고 무릎 폭이
2.1미터에 이른다. 부처님을 꺼낸 뒤에 나머지 부분은 깎아
석굴처럼 만들었다.
큰바위에서 부처님을 꺼내놓은 뒤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보광 스님은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이
계시는 원효암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다.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할 때마다 사람들의 병이 낫곤 했다. 그래서 험한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그래서 보광 스님은 법당을 짓고 사람들이 비바람을 맞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었다. 보광 스님은 절 이름을 정토사
(淨土寺)라 지었다.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약 그릇을 쥔 것을 볼 때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로 보다. 병 치료에 험하다는 약사
여래는 동방만월세계라는 정토의 부처님이었다.
그리고 큰바위 옆에 있던 작은 바위에서 다른 부처님을 찾았다.
보광 스님 밑으로 출가한 석공 스님에게 부처님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통통한 얼굴에 등 뒤에서 일어나는 배광은 타오르는 불꽃을
묘사한 화염무늬와 연꽃봉오리로 장식하고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 목에는 굵은 세 줄로 삼도(三道)가 있다. 옷은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다.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쥐고 있는 오른손의 모습 등은 뚜렷하게
남아 상생인(上生印)을 하고 있다. 신체는 당당한 어깨에 비해
팔이 짧았다. 다리와 대청을 이루고 있는 양쪽 발바닥,
직사각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가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모습
이었다.
해온이가 이 모습을 언뜻 보니 보광 스님이 처음 백석동에 왔을
정토사를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멀리 극락면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에 자신들이 찾을만한 부처님이 없어 보광 스님에게 부탁을
했다.
“보광 스님, 우리들이 살고 있는 극락면에도 부처님이 한 분
계시면 좋겠는데요.”
스님은 때가 되면 극락면에도 부처님이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믿었다. 보광 스님이 정토사를 조성한 뒤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험한 약사여래 덕분에 병들이 치료됐기
때문이다.
보광 스님은 작은 아미타 부처님이 있는 곳을 극락암(極樂庵)
이라 이름 붙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을 때면 정토사라
부르기도 했고, 극락암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절은 1930년대에
‘극락암’이라 불린 적도 있고, 1970년대에 ‘운천사’, 1980
년대에 다시 ‘정토사’, ‘백석사’로, 1990년대에 ‘극락암’으로,
다시 ‘운천사’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운천사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구름시암, 즉 운천(雲泉)에서
딴 이름이다. 백석사는 이 절이 자리한 백석산에서 유래했고
정토사나 극락암이라는 이름은 이 절에서 신봉했던 정토신앙과
관련된 이름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설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고증할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아쉽다. 다만 운천사에는 사찰에 전해왔던
현판인 ‘정토사실기(淨土寺實記, 1938년)’가 있다. 여기에는 “당
희종 2년 무신, 즉 신라 경문왕 5년에 원효 대사의 법을 받은 제자
보광화상(保光和尙)이 이곳에 정토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 맞지 않다.
당 희종 2년은 서기 875년이며 또 신라 헌강왕 1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경문왕 5년은 서기 865년이므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결국 사찰에 전해오는 이러한 전설이나 기록은 후세에 창건
내력을 높이기 위해 원효 대사의 명성을 끌어들인 것 같다.
더욱이 불상 형태로 봐서는 전통적인 고려시대 석불이라고 한다.
자연 암벽을 다듬어 불상을 앞으로 튀어나온 형태로 표현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은 전각(殿閣) 형태다. 보물 제48호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北彌勒庵)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과 같은 고려시대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신라
불상에 비해 정제미나 예술미 대신, 다소 투박하고 서민적인
느낌이 다분하다.
2002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에 자리한 마애여래불은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거리감이 없고 실제로 호흡하는 듯한 입체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실내 마애불의 생동감이 있다.
이곳은 서구 8명 중 하나인 7경에 해당한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상무지구 입구에 있는 운천호수를 뒤돌아
푸르지오아파트 뒤편에 자리한다. 운천사는 지금은 태고종
광주전남종무원 현판을 붙인 사찰이다. 원래 절이 있던 곳은
논밭이고 습지다. 도심 외곽지역이기 때문에 지금의 푸르지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운천사를 가려면 큰 도로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예전엔 운천사 인근에서는 돌미나리도
자랐고 약수터도 있었으나 이젠 볼 길이 없다.
극락암에 모셨던 아미타부처님은 1939년에 극락면으로 옮겨졌다.
보광 스님의 말대로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유촌동
주민센터 마당에 있다. 해온이가 이 부처님의 보습을 보니 눈 코
입이 선명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부처님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코를 깎아가는 바람에 현재 아미타
부처님의 얼굴 윤곽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병도 치료 해주고 아들도 낳아주던 두 분의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사람들의 희망이
부처님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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