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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4 [경렴정과 탁광무]
개발자
날짜 2018-04-06 조회수 1,033
첨부파일
날이 참 좋다. 봄이 되니 하늘도 맑고 산들도 푸르름이 돋아난다.
이런 날이면 가족들과 손잡고 가까운 곳에 가서 산들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해온이는 햇볕이 따사로운 봄 기운을 맛보기
위해 바깥나들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운천사 보광 스님은
열심히 기도 수행 중이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멀리 가지 않고 우선 백석산 인근을
산책하는 일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일행이 있으면 이야기도
나누겠지만 아직은 혼자다. 혼자서도 산과 연못이 있다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빼어난 경치는
호남 땅이 제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풍경이 좋은 장소가 절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운천사에 보광 스님의 뒤를 따라 온 뒤로 한 번도 바깥 구경을
못해본 터다. 절에 자주 오는 보살님으로부터 대충 길 안내를
받았다. 10리 길도 못된다는 말에 마음이 쏠렸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노래가락 소리가 들린다. 슬그머니 운천사 108계단을
내려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쫑긋 하고는 방향을 찾았다.
‘하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정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성 싶었다. 그렇게 소리 나는 곳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정자에는 세 사람이 앉아 한 사람은 시를
읊고, 한 사람은 술을 따르고, 그리고 한 사람은 시를 읊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채 웃는 것이었다. 술을 따르던 사람도
웃기는 매 한가지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갈 수
없었다.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섬으로 가려면 나룻배라도 있어야
했다. 주위에는 배도 없었다. 해온이는 멀리서 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때는 고려 말이었다. 정자 아래에 있는 못에는 연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시를 읊는 사람은 탁광무(卓光戊)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장사 탁의 손자이다. 본관이 광산이며 다르게 부르는
이름(字)은 겸부(謙夫), 호는 경렴정(景濂亭)이었고, 시호가
문정(文正)이었다. 시호가 있는 것을 보면 왕이 총애했던
모양이다. 벼슬도 내서사인, 좌사간대부, 예의판서 등을 역임
했다.
정자에서 술을 따르는 이는 그의 아들 탁신이었다. 그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채 두 사람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호탕하게 웃는 이는 익재 이제현이다. 두 사람 사이는
친구인 듯 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하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매우 친해보다.
1366년(공민왕13) 탁광무가 우사의대부로 있을 때다. 당시
조정의 모든 세력을 장악했던 승려 신돈(?~1371)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때다. 그에게 아부하여 심복이 된 홍통
(?~1395)의 행패는 말 못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 찾아가 못살게 굴곤 했다.

홍통은 첨의찬성사 홍경의 손자이며, 선공부령 증문하시중
홍승연의 아들이다. 부친과 할아버지가 벼슬을 지낸 배경으로
작은 벼슬을 얻었다. 그러다가 안동부사를 거쳐 귀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잔치를 관장하던 정3품 판전객시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김경유의 말을 빼앗은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된 전례가
있다.
김경유에게 농사 짓는 땅이 있었다. 이 땅의 일부가 홍통의
땅과 맞닿아 있다. 그러다보니 큰 비가 내릴 때면 자주 논둑이
허물어져 다시 쌓을 때마다 땅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다. 이를
핑계 삼아 홍통은 땅을 더 늘릴 심보를 가졌다. 그는
김경유에게 자신의 땅이 더 들어갔다며 내놓으라고 어거지를
부렸다.
가을이 되어 김경유가 쌀을 수확했다. 홍통은 자신과 땅
문제에 대해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수확을 했다며 화를
냈다. 홍통은 한밤중에 김경유의 집에 찾아가 말 여섯 필을
강제로 빼앗았다. 김경유는 다음날 자신의 땅문서를 들고 관청을
찾아가 고발했다. 고발을 받은 관청에서는 홍통을 국문해
호남이 자백을 받아내고는 곤장을 때리고 파직시켰다.
그 뒤로 다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신돈에게 빌붙었다.
홍통은 신돈에게 늘 음식을 보내고 문안 인사를 올렸다.
홍통은 신돈이 어디든 출입할 때마다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신돈은 이렇게 자신을 대접하는 홍통이 좋았다.
홍통이 나중에 감찰대부와 직부사를 지낸 것은 모두 신돈이
힘을 써 준 덕이었다.
한번은 고려의 세 개의 성(省) 가운데 백관을 총괄하여 거느린
중앙의 상서도성(尙書都省) 뜰에서 팔관회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팔관회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의식의 하나로
중요시되었다. 이때의 팔관회는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 등
토속신에게 지내는 의식과 같았다.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해졌다.
이 중대한 행사에 홍통이 별군(別軍)을 지휘해 참석했다. 이
제사상에서 홍통의 별군이 제물을 훔쳐가는 일이 있었다. 이
때 몇몇 관리가 별군들에게 꾸짖고 그런 짓을 못하게 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홍통이 제사상이 별 것이냐며 별군을 풀어
그렇게 꾸짖은 관리를 찾아가 집단 행패를 부렸다. 이 때
관리들은 좌사의대부인 신덕린, 헌납인 박진록과 이준, 정언인
정리와 안면이었다. 중과부적으로 다섯명의 관리가 모두 다쳐서
제사 병풍과 요에 피가 낭자했다.
우사의대부인 탁광무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별군이 관리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본 탁광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간관을 폭행하다니!”라며 그는 홍통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도록 탄핵했다.
“홍통이 별군을 부추겨서 간관을 능멸했으니 이런 짓을
묵과한다면 그 무엇인들 못 참겠습니까?”라고 탄핵하면서
임금에게 그를 파직시켜 평민으로 강등하고 가산을 몰수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신돈이 자신을 따라 다닌 홍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힘써 주어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
반대로 탄핵을 한 탁광무와 왕명을 어겼다고 누명을 쓴 신덕린은
박진손, 이준, 정리, 안면과 함께 파면되었다. 신덕린은 나중에
조선이 건국되자 복직에 힘쓰지 않고 광주로 내려와 은거하며
씨를 썼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능숙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라 할 정도다. 그의 서체 모각본이 에 전한다.
탁광무는 매우 강직한 성격을 지녔다. 신돈의 모함을 받아
파직당한 그는 더 조정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낙향했다. 그는 정자를 짓고 원근의 친구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시를 읊고 술 한잔씩 나누는 재미를 붙다. 그는 우탁(禹倬,
1262~1342)과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 배우고
이색(李穡, 1328~1396)과 문익점(文益漸, 1331~1400),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이숭인(李崇仁, 1347~1392)과
을 주고받았다.
신돈과 홍통을 어쩌지 못하고 낙향한 그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려했던 답답한 마음[遣悶]을 시로 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면서도 하늘을 원망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한 구가 다섯 자씩으로 된
네 줄로 된 한시인 오언절구를 이렇듯 무려 열일곱 수나 읊었다.
해온이는 그가 읊고 있는 시를 조용히 들어보니 참으로 애절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세상과 맞지 않으면 스스로 떠나면 그만이었던가.
포부를 펼 수 없어도 낙향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인간 중심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고향 가까운 곳에 정자를
짓고 그윽한 산수를 배경으로 풍광이 트인 곳에서 마음을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힐링을 했다.
그는 같이 하는 문인들과 자주 맑은 마음을 북돋우며 시문을
창작하고 학문을 닦으며 서로 만났다. 그의 정자는 성찰과
소통의 열린 문화공간인 셈이었다.
이러한 누정문화는 호남에서 일찍이 발달하다. 광주의 누정
이야기를 남긴 정인서의 와 같은 기록으로
보면 광주에는 약 250여개의 누정이 광주천과 산강, 극락강,
황룡강 변에 있었다. 그 가운데 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바로 ‘경렴정(景濂亭)’
이라고 했다. 이 정자의
주인은 바로 탁광무
이다. 탁광무는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이어 말년을 지냈다.
탁광무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세상을 떠난 것인
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스승이나 문인들과 관계, 벼슬에 오른
시기를 볼 때 그가 활동했던 기간이 1330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탁광무는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로 문하시중
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이제현은 탁광무의 정자 이름을 ‘경렴정(景濂亭)’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경렴정’이라는 시 한 수로 화답했다. 탁광무의
요즘 신세를 말하는 듯 했다. 고향에 낙향한 그에게 도연명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유유자적하며 물아지경에 이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다. 권16에 실려 있다.

이제현의 시와 함께 ‘경렴정’이 떠오를 때면 함께 등장하는 시가
있다. 이 시는 탁광무의 문집인 권1에 실려 있는 ‘경렴
정편액(景濂亭扁額)’이다. 광주 고문학의 시조격에 해당한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의미있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에 나타난 ‘호남’
이란 말이 우리 지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권력 욕구와 암투를 벗어나 자연과
합일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권력이 없어도 세상을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고 좋은 술 마시고
취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면 충분히 만족에
취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제현이 지어준 ‘경렴정’은 ‘염계(濂溪)를 경모(景慕)하라’는 뜻이다. 염계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우주와 생명의
대서사’로 일컬어지는 ‘태극도설’로 성리학의 지평을 연 인물
이다. 그의 기상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이 맑고 밝았으며,
연꽃을 ‘꽃 중의 군자’로 무척 사랑하다. 주돈이는 연꽃을
통해서 군자의 이미지를 가장 적절하게 말하고자 했다. 나중에
많은 유학자들이 연꽃을 깨끗함의 상징으로 삼고 그렇게 생각을
갖게 될 정도로 큰 향을 끼쳤다.
옛 선비들은 대부분 각기 좋아하는 화초가 한 가지 이상은
있었다. 어부사(漁夫辭)를 쓴 굴원(屈原)의 난초와 도연명(陶淵
明)의 국화와 염계(濂溪)의 연꽃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마음에 들어있는 가치관이나 철학적인 의미가 꽃에 붙여 설명
되고 있어 그 의미가 중첩되어 전해온다. 난초에는 향기로운
덕이 있고, 국화에는 세상을 피한 도덕군자의 높은 뜻을 볼 수
있다.

주돈이는 “연꽃은 꽃 중의 군자”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연꽃을
나만큼 사랑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연꽃의 군자됨을 알면 염계의 즐거움을 거의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도전(1342~1398)의 ‘경렴정명후설(景濂
亭銘後說)’, 즉 경렴정 이름이 지어진 배경에 대한 내용에서
전한다. 해온이는 염계 주돈이의 철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꽃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로 인하여 성현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렴풋이라도 꽃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해온이는 서거정(1420~1488)이 1478년에 편찬한 이라는
책을 찾았다. 이 책의 권97(說遍)에 ‘경렴정명후설’이라는 삼봉
정도전의 이 실려 있다고 해 꼼꼼히 읽어볼 요량이었다. 제대로
읽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1377년 가을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길에 전남 장성군
진원면의 불태산 취봉사(鷲峯寺)를 들렸다.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탁광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도전은
반가운 마음에 편지를 써 인편으로 보냈다.
“스님이 멀리 선생 댁을 가리키는데, 하얀 돌 맑은 샘 있는 골짜기가
그윽하군요.”
하얀 돌[白石] 맑은 샘 골짜기[泉谷]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오늘날 광주시 북구 석곡동(石谷洞) 인근이라고 하고, 후손인
광주의 탁인석 박사는 족보의 기록을 들어 광산구 월계동 무양서원
인근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석곡동에는 백석이나 천곡이라는 지명이
없고 탁형채씨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광산구 비아면 월계리 407번지
일대에 탁신(1367~1426)이 지었다는 탁송정의 주춧돌과 600여년
된 오래된 노거수가 남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경렴정도 이곳에
있었다고 추측한다.
기록으로 보면 주소는 지금의 광산구 월계동 841-7번지이다.
탁형채씨의 말에 따르면 무등산을 바라볼 때 무양서원武陽書院
(월계동 535-2)을 동쪽에 두고 왼쪽에 월계저수지가 있었는 데 그
사이에 정자터가 있었고 약간 경사진 언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소지는 지금 주택단지로 변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무양서원에서 산월초등학교를 지나 270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양서원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정도전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탁광무를 존중하다. 그는 여러
차례 광주에 들렸다. 그리고 경렴정도 찾았다. 탁광무와 술 한잔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정도전은 옛 인연이 생각난
것이다. 그와 을 주고받은 이들이 보내온 시 다섯편이 있다.
경렴정에 빗대어 탁광무의 굳은 신의와 꿋꿋한 태도를 말해주고 있는
오언절구이다.

이렇듯 다섯편의 시가 말하는 경렴정과 탁광무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이
시대에 다시 탁광무를 만나고 싶고 경렴정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껏 드높아진다. 광주 토박이 성씨 중 하나인 탁(卓)씨에 대한 기록은
에 등장한다. 광산탁씨는 고려 선종 때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탁문(卓文英) 후손 탁지엽(卓之葉, 1023~1094)이
광주에 들어와 살다가 한림학사가 되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탁지엽이 활동한 시기는 고려 13대 성종(1083
1094)대로 손자는 탁지광(之光), 그의 아들이 탁사정(思正), 8세가
탁광무이다. 탁광무의 부인이 광주 김씨이고 탁광무의 아들 탁신(卓
虞, 1367~1426)의 둘째 부인이 광주 정씨인 것으로 보아 이때
광주토반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곡리 내촌, 현재의 광산구 월계동 뒷산에서 탁신 부인의 회격묘가
발굴되었다. 1990년 운암동에서 발굴된 석회, 숯, 모래 등을 혼합해
만든 회격묘는 탁지엽의 묘로 확인돼 서구 마륵동 탁씨 묘역으로
옮겨졌다. 서구 마륵동에는 탁씨와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광주향교 이전과 관련된 것이다.
고려 때 처음 건립된 광주향교는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었으나
호랑이의 잦은 출몰 때문에 향교를 읍성 동문 안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좁고 오래 된데다 홍수피해를 자주 입자 1488년 수령으로 부임한
권수평이 사재를 털어 땅과 책, 자재 등을 사는 것을 보고 광주
고을민들도 서로 힘을 보태 새 향교를 완공했다고 한다. 이때 옮긴 향교
자리가 광산 탁씨의 탁신 묘역으로 이를 교섭하여 양도받은 것이며,
탁신의 묘역은 서창 마륵리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일제강점기 일본인
야마모토(山本)이 쓴 에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탁씨에
관련된 전설 ‘피보다 진한 사랑’이 전해진다.
에는 ‘경렴선생애련도’라는 그림이 있다. 목판화인
듯 하지만 탁광무가 그만큼 연꽃을 좋아했다는 점을 후손들도
기억하고 있다. 다행히 광산탁씨 광주종친회장인 탁인석 박사를
비롯해서 광주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경렴정복원추진위원회를
준비했다.
2018년 2월 28일 5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위원장에 김종
전 조선대 교수를 선임하는 등 결성 절차를 밟았다. 문화도시 광주의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호남
선비의 고장답게 정자문화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있다고 할 것이다.
해온이는 이런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면 광주에도 새로운 문화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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