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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역사여행2 [눌재 박상 선생과 절골마을]
개발자
날짜 2018-03-09 조회수 1,032
첨부파일
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최 혁 지음
원고 도움 정인서
사진 도움 이현숙 정인서 최정부 서구청 조선대박물관

호남의 정신이 태어난 서창 절골마을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는 날이다. 서구사랑 해온이는
의로움의 실천가라 일컫는 선생을 찾아갔다. 아침부터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눈이 내려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선생님과 약속한 터라 길을 나서기로 했다.
옛날 옛적 조선시대,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에 살았던 아주
유명한 학자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3-1530) 선생
이다.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정조대왕은 ‘조선
최고의 시인은 박상’이라고 말했다.
눌재 선생은 무려 1천200여 편의 한시를 남겼다. 선생이 남긴
시에는 가족들에 대한 사랑,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
세상의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꾸짖음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눌재 선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해온이는 이게 안타까웠다. 선생은 만 잘 지었던 분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권력을 업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엄벌에
처했던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다. 또 목숨을 걸고 중종 임금의
잘못을 지적했다. 삶과 이 동일했던 분이다. 그래서 해온이는
더욱 존경스러운 분이어서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눌재 선생은 이 권력에 아부하는 수단으로 쓰이거나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는 댓가로 부귀를 누리는 오늘의 현실에 귀감이
되는 분이다. 그 자랑스러운 눌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절골 마을이다. 절골 마을은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는 마을이다.
서구 매월동 전평저수지에서 회재로를 타고 나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백마교차로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1킬로미터 정도를 들어가면 절골 마을이 나타난다. 절골은
예전에 그곳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절은 없고 절 자리로 알려진 곳에는 일반 가옥이 들어서 있다.
절골 마을 안쪽에는 봉산재(鳳山齋)가 있다. 봉산재는 눌재 박상
선생의 재실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 박지흥(朴智興)이다.
찬성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하촌(荷村) 박정(朴禎),
둘째는 눌재 박상, 셋째가 육봉(六峯) 박우(朴祐)이다.
박우의 아들이 유명한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이다. 사암 박순은 선조 때 15년 동안 의정을 지냈다.
봉산재에서 100미터 쯤 더 들어가면 박지흥과 박정을 모시는
재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3개의 재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서창동(西倉洞)에 있는 송학산(201m) 북쪽 기슭이다.
봉산재는 예전에는 계곡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런데 재실과의
거리가 너무 먼 탓에 관리하기가 힘들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앞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에는 연꽃이
많았으며 향기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방하동(芳荷洞)이었다. 일제가 마을 이름을 한자식으로 정비
눌재 하면서 사동(寺洞)으로 고쳐버렸다.
사동 절골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창1통이다. 서창1통
행정구역은 본 마을인 절골 마을과 이곳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불암 마을까지 합친 것이다.
광주광역시는 눌재 박상 선생이 태어난 절골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여 있는 큰 길을 눌재로라고 이름 붙다. 눌재로
구간은 서창 IC에서 서창주민센터를 거쳐 벽진교를 지나 현재
남구 도시첨단산업단지 공사현장이 있는 지석제 연못 옆으로
이르는 길이다. 매월동 전평호수에서 나주 방향으로 가다가
백마교차로 좌측 왼쪽에 있는 사동마을을 바라보면서 눌재
선생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사동마을에 들어온 충주 박씨 박지흥과 그의 아들들
충주 박씨 가운데 사동 마을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박지흥
이다. 바로 눌재 선생의 아버지이다. 박지흥의 조상은 원래
개경에서 살았으나 충남 대덕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충주
박씨의 8대 후손인 박광리에게는 윤수, 진, 소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셋째 소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가 지흥이다.

박지흥은 1411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성균진사에 장원급제
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실망해 벼슬의 꿈을 버리고 처가인
하동정씨 연고지 광주로 낙향하게 된다. 이 때 장성 갈재를
넘다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광주목 방하동’이 살만한
곳이라는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터를 잡게 된지 2년쯤 지나 박지흥의 처 하동
정씨가 자식을 낳지 않은 상태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다.
박지흥은 방하마을 계성(桂城) 서씨 집안 처녀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한다. 박지흥과 서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이 박정,
박상, 박우이다.
호남사림의 문을 연 박상, 훌륭한 목민관이었던 박우, 의로움을
위해 권세가들에 맞서다 파직 당했으나 결국 의정에 오른 박순
등이 모두 절골 마을 태생이다. 절골 마을은 조선 선비의 기개와
높은 학문을 키워낸 곳이다.
박지흥의 장남 하촌 박정은 1467년(세조 13) 절골에서 태어났다.
23세 때인 1489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돌보며 16세 눌재와 14세 육봉을 보살폈다. 동생들을 가르치며
곧은 성품으로 클 수 있도록 애를 썼다. 눌재와 육봉의 학문이
크게 깨칠 수 있었던 것은 맏형 하촌공의 공이 크다. 그러나 하촌
박정은 향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눌재 선생은 1474년(성종 5)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지흥은
63세가 되던 어느 날 고향인 대덕을 가기 위해 부인 서씨를
데리고 갈재를 넘다 입암산 아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큰 바위 하나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다. 서씨 부인도
장성 입암산의 큰 바위가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박상
선생을 임신한다.
눌재 선생은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중시에 장원급제했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등을
지내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전라도사에 임명됐다. 지금의 부지사에
해당한다. 선생은 훈구(勳舊)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관직생활 대부분을 지방에서 보냈다. 중종이 성급하게 친척을
중용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간언했다가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했다.
선생은 대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 임피현감(臨陂縣監)
등을 지냈다. 그러나 담양부사로 있을 때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했다. ‘신씨 복위소’는
폐위됐던 중종의 비(妃)를 다시 왕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상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종의 분노를 사서 나주 오림역 (烏林
驛)에 유배되기도 했다.
박원종 등 연산군 폐출에 앞장선 이들이 신수근(愼守勤)에게
함께 반기를 들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반란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 가담하지 않았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쿠데타
세력들은 중종의 장인이긴 했으나 신수근을 죽이고 잠저(潛邸;
나라를 새로 세웠거나 세자가 아닌 종실 가운데 즉위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기간을 일컫는 말) 시절의
처던 신씨의 딸을 폐위시켰다.
그 후 10년이 지난 1515년 중종의 새 왕비가 된 윤여필의 딸
윤씨(장경왕후)가 아들을 낳은 후 7일 만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조정은 누구를 다시 왕비로 세울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은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부인이 있는데 첩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림세력이 중요시하는 의로움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반정
공신들의 국정농단과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횡포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다 유배에 처해졌던 박상 선생은 조광조 등의
도움을 받아 1516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다.
이후 의빈부도사(都事), 순천부사, 상주충주나주목사(牧使)
등을 지냈다. 1529년 신병으로 사직을 요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돌아와 지내다 다음해인 1530년 세상을 떴다.
셋째 아들 육봉 박우는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507년
(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병조정랑, 직제학, 좌승지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강직한 성품인 탓에
당시 권세가 김안로와 허확과 허항 부자(父子) 등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기도 했다. 아첨을 하지 않고 직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병조참의, 이조참의, 한성부우윤(漢城
府右尹)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인종 때는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中宗實錄) 편찬을 감수했다.
명종 때 전주부윤이 됐다.
박우는 박개와 박순 아들 둘을 두었다. 차남 순은 나중에 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사암 박순은 윤원형과 훈구대신 등 조정의 권력자들이
전횡을 하자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곧잘 주장했다.
박순은 의정에 오른 뒤 15년을 재직했으나 율곡 이이가 탄핵을
받을 때 그를 옹호했다가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된다. 이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부근의 백운산에
은거했다. 사암 선생은 광주 월봉서원과 나주 월정서원, 평 옥병서원,
개성 화곡서원등에 배향돼 있다. 광주 소촌동 송호당(松湖影
堂)은 눌재 박상 선생과 사암 박순 선생을 모시고 있는 재실
이기도 하다.

호남사림과 충의정신의 원조 눌재 선생
의로움과 충효를 중시하는 호남의 선비정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충의정신으로 발휘된다.
수많은 호남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호남의병정신은 뒤에 실학사상과 위정척사, 한말의병활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5·18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온이는 이러한 의로움이 호남정신의 태동과 형성을 이루었고,
그 중심에 박상 선생이 계신다고 생각한다. 눌재 선생은 충(忠)
이란 정의로움을 실천하는데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는 조선 건국에 공이 컸거나 조정 권력을 쥐고 있었던
훈구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무능하고 탐욕스럽던 자들이
왕의 친척들이라는 이유로 관직을 꿰차고 조정을 어지럽게 하던
때다.
선생은 이 훈구파들의 전횡에 맞서던 분이었다. 선생은 의를
중시했다. 의리는 절의이다. 박상 선생은 사림문화를 선도하며
후학들에게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강조했다. 불의에 항거하며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선생의 삶은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생전의 조광조는 박상 선생에 대해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고 칭찬했다. 퇴계 이황 역시 ‘하늘이 내린 원우(元祐)와
완인’(完人)이라고 극찬을 했다. 완인은 행동과 인품에 흠결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박상 선생은 고려 말 이색과, 정몽주 등의 절의정신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선생이 평생에 걸쳐 실천하고자 했던 절의정신은 그의
조카 박순을 통해 조선 성리학 정신으로 뿌리를 내렸다. 박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우고 이황, 이이, 성혼, 기대승 등과
교우하며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던 윤원형을 축출하고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는 사림 인사들은 박상과 박순으로
이어지는 학문 계통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시도했다. 이 개혁의
요람이 호남이었으며 그 주체가 호남사림이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올바름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절의정신이었다. 이는 호남정신으로 구현돼 나라를 구하는
충의정신으로 확대됐다.
박상 선생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불의를 없애는데 얼마나 용감
용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때는 1505년(연산군
11) 8월이었다. 선생은 불과 32세의 나이에 전라도사(全羅都事,
눌재 오늘날의 전라도 부지사에 해당)가 되어 나주에 내려왔다. 지방
도사는 지방 관리들을 감독하는 자리다.
그때 나주에서는 황쇠부리(黃牛夫里)라는 사람이 연산군의
권력을 믿고 갖은 횡포를 다 부리고 있었다. 이 쇠부리는 원래
미천한 사람이었다. 당시 연산군은 채홍사를 풀어 미색이 뛰어난
처녀들을 성노리개 감으로 데려갔는데 끌려간 쇠부리 딸이
연산군의 눈에 들었다. 그의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자 세도를
부리며 남의 처자와 땅을 빼앗는 등 행패를 일삼았다.
어떤 나주목사가 이를 보다 못해 저지하자 쇠부리는 서울 딸에게
이를 알려 나주목사를 쫓아버리기도 했다. 연산군이 쇠부리를
감싸고 돈 것이다. 아무도 쇠부리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했다.
쇠부리를 처벌하면 곧 연산군에 대항하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상 선생은 쇠부리의 행패를 전해 듣고 곧바로 그를
잡아오도록 했다. 그런 다음 금성관(錦城館; 나주 객사) 뜰에서
쇠부리에게 곤장을 때렸다. 곤장을 맞던 쇠부리는 현장에서
죽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박상
박상이 쇠부리를 죽다는 소식을 들은 연산군은 금부도사에게
박상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했다. 박상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돼 버렸다. 박상은 개의치 않았다. 잡혀가는 것보다 스스로 왕
앞에 나가는 것이 당당하다고 생각하고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한양을 가려면 노령산맥이 걸쳐져 있는 장성 갈재를
넘어야 한다.
장성 갈재는 아버지가 낙향해 광주로 향할 때,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자리를 잡고 살아갈 곳으로 방하마을을 찍어준 곳이다.
또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할 때 태몽을 꾼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갈재는 박상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장성 갈재를 넘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막아선 것이다. 고양이는 박상 선생이 탄
말을 위협하면서 자꾸만 앞을 막았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 것이다. 이상하다 싶어 박상선생은 고양이를 따라갔다.
고양이는 좁은 산길로만 박상 선생을 인도했다. 며칠을 걸려
도착해보니 그곳은 바로 금강산 정양사다. 정양사 주지는
며칠째 사라졌던 절 고양이가 범상치 않은 인물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어찌된 문인지를 물었다.
박상 선생의 대답을 들은 주지 스님은 신령의 도움이라며
정양사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박상을 숨겨두었다. 그런데 한 달
만인 9월에 종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박상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정은 그 뒤에 이를 불문에
붙다.
박상은 세상을 뜨기 전에 경기도 하남시 오산리에 있는 논 40
마지기를 사서 정양사에 주었다. 여기에서 나온 곡식으로 목숨을
살려준 고양이를 보살피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
논을 ‘묘답’(猫沓)이라 불다. 일제강점기에 이 묘답은 주인이
없다 해서 몰수당했다고 전해진다.
해온이는 박상 선생의 집을 찾아가면서 광주가 왜 의향의 고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의로운 사상의 실천가 박상 선생으로부터
우리는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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