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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7 [눈물바위 읍궁암과 고광선의 엄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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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16 조회수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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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이의 서구 역사여행 7 눈물바위 읍궁암과 고광선의 엄이재

해온이는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이 땅에 온 이래 처음 눈물을
흘린 것 같다. 이전에 언제 눈물을 흘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눈물바위 앞에 서있어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읍궁암泣弓岩이라고 한자로 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눈물
바위이다. 파란 이끼가 끼어 있다. 해변가도 아니고 습기가 많은
곳도 아닌데 산 중턱 바위에 이끼가 끼어있다니 놀랄 일이다.
어쨌든 눈물바위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나온다. 누구나 그러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세상에 열손가락보다 더 많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은 나라 잃은
슬픔과 임금님의 승하 소식을 들은 현와 고광선 선생 (1855~
1934) 때문이다. 그는 3년 동안 이 눈물바위를 임금의 묘로 삼아
곡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해온이는 스스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곳을 가려면 서부농산물도매시장과 전평호수를 지나 봉학
제에 못미쳐 오른쪽 길로 들어간다. 곧바로 도로 오른편에
‘용두동’이라는 큰 씨 아래 봉학마을을 비롯하여 구룡, 마현,
신용 등 4개 마을의 이름이 적힌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마을
이름이 한꺼번에 적힌 비를 보니 왠지 생경스럽다.
100여 미터쯤 들어가 왼편으로 ‘봉학鳳鶴’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봉황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옆에는 ‘봉산사통로’라는
작은 표지석이 기울어져 서 있다. 봉산사의 쇠락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여기에서 봉산사까지는 6백미터쯤 올라가야 한다.

■ 귀를 닫고 읊은 시
눈물바위는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꽤 깊숙한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있다. 눈물바위는 엄이재掩耳齋와 봉산정사鳳山精舍의
왼편에 있는 바위이다. 10여미터만 들어가면 된다. 엄이재는
서구 봉학길 63(용두동 산 80번지)에 있다.
엄이재는 현와 선생이 주로 기거하며 책을 읽고 을 쓰며 강학을
했던 곳이다. 문인 수는 650명에 이른다고 한다.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현와 선생은 남구 압촌마을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을사오적에 의하여 나라가 일본과 강제로
보호조약이 맺어지고 주권을 잃었다. 병조판서와 형조판서
그리고 주미전권대사를 지낸 민환(1861~1905), 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조병세(1827~1905) 등 지사들의 자결소식도
들었다.
현와 선생은 이런 소식들을 듣는 것 자체가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졌다. 가까운 봉황산 중턱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
耳]’ 싶어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 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는다. 1906년의 일이다. 스승인 나도규 역시 봉황산의 덕암
에서 살았으므로 그 향을 받은 듯하다.
현와 선생은 엄이재에 앉아 구한말 초라한 모습의 자신을 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엄이재 현판은 1916년 봄에 사촌인 고광은이 쓴 것이다. 마루는
물론 집 앞 마당에는 잡동사니가 있었다. 왠지 쓸쓸해 보다.
고광은은 1936년 숭문당에서 간행된 14장의 도표 형식으로 된
의 씨를 쓰기도 했다.
눈물바위인 읍궁암은 한 지식인이 일제하라는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흔적이다.

백의백립白衣白笠으로 북향을 향해 통곡한다는 것은 선비들
에게는 가장 비통한 심정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데 이어 1918년 고종 임금이 승하하자
현와 선생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 고종 임금을 몹시
흠모했다. 승하 소식을 들은 그는 슬픔에 잠겨 엄이재 뒤에 있는
큰 바위에 읍궁암이라는 씨를 새겨놓았다. 이 바위를 고종
임금의 능묘로 삼았다. 아침저녁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3년 동안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그가 지은 엄이재원운掩耳齋原韻에는
그의 고뇌가 서려 있다. 그는 엄이동 골짜기를 외로운 섬으로
비유하여 을 썼다.

■ 고경명 고정헌 등 뼈대있는 집안
현와 선생의 직계 선조들을 보면 상당히 뼈대가 있다. 그는 조선
때 좌랑을 지낸 하천 고운(1479~1530)과 손자인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1533~1592)의 7대손인 1783년(정조7)
복헌 고정헌(1735~?)의 후손이다. 고정헌은 임진왜란 (1592),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 (1636), 이인좌의 난
(1728)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호남지방 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한 을 1799년(정조23)에 간행한
인물이다. 의병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했다는 것은 호남의
의리정신을 알게 해준다.
고광선의 아버지는 호은 고박주, 어머니는 행주 기씨 기우진의
딸이다. 8살 무렵 아버지 호은에게서 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송독誦讀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이며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노사
기정진(1798~1879)을 찾았다. 그의 문하에 들어가 천인성명
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일용日用의 예절을 배웠다.
고광선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고 행동이 비범하여 또래의
아이들과 함부로 장난하지 않았다 한다.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독려 없이 스스로 , , , 등 경서와 <
노자>, , , 등의 제자서를 읽고 깨쳤다고
전한다. 고광선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바를 듣고서, “도가 여기에
있다”라 하며 기뻐했다 한다.
노사 선생의 문하에서 그와 함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은 난와
오계수, 일신 정의림, 석음 박노술, 후석 오준선, 춘담 기동중,
송사 기우만 등이 있다.
그가 10살 때인 1864년 어머니를 여의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상주로서 역할을 제대로 했다. 장례를 마치 어른처럼
지키고,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위로하여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어려서부터 장남다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거적자리에서 잠자고 흙더미를 베개로 삼을 만큼의 침점침괴枕�寢塊하는
상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날마다 묘소에 올라가 성묘하고
통곡하다고 한다.
계모는 광산 김씨는데 친어머니 이상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의지처가 되기도 했지만 계모 또한 특한
고광선의 모습에 즐거움을 가졌다. 부친의 친구들이 그의 재주를
보고 장차 크게 될 것을 기대했다.
고광선은 25세 되던 해에 노사 선생이 타계하자 남구 석정동(당시
나주 계촌면 내동리) 남덕정에서 강학을 하던 덕암 나도규
(1826~1885)를 찾아가 공부를 했다. 나도규 역시 노사 선생으로
부터 성리학과 예학 등에 대해서 배웠다. 실력은 뛰어났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유교 경전과 예학, 음양의 이치 등을 연구
하며 후학을 양성한 인물이다.
1894년 40세 때 동학란이 일어나자 소위 식자들도 휩쓸려 좇으며
백성을 유혹하다. 그는 그 어지러움을 심히 걱정하며 돌아가신
노사 선생의 배움을 생각하고 서로 협력하여 마을 사람들의 거동을
바르게 했다. 주변 고을이 난리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안전할 수
있었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담백하여 세상과 썩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와 교유한 인물로는 구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인 남파 설진
(1869~1940)을 들 수 있다. 남파는 1895년(고종32)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송사 기우만(1846~1916)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과 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운 인물이다.
현와 선생은 몸은 비록 척박한 시골에 있으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으로 봉황산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뒤
두문불출했다. 해온이는 이런 현와 선생의 모습에 자신도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며 주위를 지켰다. 현와 선생은 엄이재에 들어앉아
교유를 끊고 세상을 마치고자 하으나, 그의 학덕을 기리는 이
지방 선비들이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안 원근의 학도가 책을 들고 막힌 곳을
물으러 찾아들었다. 그는 찾아온 사람을 물리치지 못하고 학문의
요람처럼 이에 응하니, 그 가르침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새 그의 엄이재 띠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봉황산 일대는
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해온이도 따라서 송독을 했다.
제자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구국의 지절을
일깨우고 선비의 덕의와 사변도 가르쳤다.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늘어 그 수를 감당하지 못하자, 문인들이 힘을 모아 그 옆에
봉산정사를 지어서 이곳에서 강학하다.
현와 선생은 1934년 병이 들어 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35년 1월 20일 엄이재 앞 50여미터쯤에 안장했다.
‘현와고선생지묘’라는 비석이 있고 그 옆에 현와 선생의 활동을
기록한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 비석이 있다. 부인인 조읍예의
비석은 다른 이들과 함께 작은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현와 선생 묘지 왼편에 ‘장흥고씨복헌공파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복헌 고정헌을 비롯하여 현와 선생의 부친인 호은 고박주에
이르기까지 18기의 평비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하나하나
봉분을 하지 않아 작은 면적에 현와 선생의 직계 선조를 한꺼번에
모셔둔 모습이 아름다워 보다.
봉산정사 왼편에 고직사 건물이 지금은 창고처럼 쓰이고 있고,
현와 선생의 당은 봉산정사 오른편 산 밑에 있었다. 광주향교
유림들의 논의를 거쳐 1964년에는 당 앞에 봉산사鳳山祠를
세우고 그의 위패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엄이재를 중건
하다.
의 문인록에 올라 있는 고광선의 문인 수는
650명에 이른다. 봉산사지는 1978년에 간행된 봉산사의
기록이다. 봉산사는 그의 사후에 후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봉산사 묘정비, 추모제 유허비, 솟을대문인
상의문이 있었다.
봉산정사라 간판을 붙인 곳은 절로 운되고 있었다. 연등이
처마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천부도天父道 만덕사滿德寺
라는 곳이다. 반야심경 등 불경 게송이 흘러나오고 부처상을
갖춘 법당이 있지만 다른 교리를 갖고 있다. 도주는 이순제이다.
이순제 도주에 따르면 현와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봉산사는
이곳을 찾는 후손이나 제자들의 발길이 거의 없다고 한다.
장흥고씨 문중에서 최근 복헌공파제단을 새롭게 단장했지만
봉산사 뒤에 있던 당은 몇 해 전에 무너졌고 봉산사도 2016년
들어 허물어졌다. 그해 여름 봉산사는 흔적마저 치워 이제
빈터만 남아 있다. 이순제 도주는 봉산사와 상의문 현판만 겨우
보관하고 있었다.
해온이는 이것마저 사라졌다면 어쩔까 싶었다.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져 아쉬움만 남는다.

■ 현와로부터 광주정신 찾기
현와 선생의 행적은 에 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16
권 8책으로 된 방대한 개인 문집인 석인본이다. 그의 시문은 시가 247
수, 문이 1439편으로 도합 1686편에 달한다. 그의 제자들인 송애
박하형(1891~1971) 등 문인들이 편집하여 1962년에 간행되었다.
덕은 송재직의 서문과 제자인 월성 최윤환, 박하형 등의 발문이 있다.
해온이는 그의 시와 문 등 이 1686편이나 된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의 문학적 예술성을 떠나서라도 그의 대단한 능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고광선의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량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편지이나 잡저 등은 일상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특별한 것을 추출해내기가 힘들다.
사물과 인생에 대한 순수한 감동과 사색에 비롯된 작품보다는 청탁에
의해 쓴 들이 많다. 그렇지만 역시 작품성을 갖추고 있다.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치한 감상을 통해 따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증시贈詩와 차운次韻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증시와 차운시가
많다는 것은 시문의 제작이 인간관계 속에서 지어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즉, 전체 시문을 두고 보면 예술적인 미감보다는 사람의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시작품에 나타난 내용은 교훈적인 색채가 강하다. 사물을 보고
느낀 정서는 곧 자기에 대한 반성과 타인에 대한 권선 또는 훈계로
전환해 귀결된다. 서정적인 성격이 약한 반면 실천적 의리정신을
강조한 내용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군자는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그 행동을 바꾸지 않고, 할 만할 때에 할 만한
것을 하는 사람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것과 언행을 경계하는 교훈적인 시도
있다. ‘차길시은성돈십次吉市隱聖敦十詠’은 효孝 우友 목睦 노인老
人 상喪 장葬 기구飢口 등 10수로 구성된 시이다. 길성돈의 우애와
청렴한 행위를 칭송하며 교훈으로 삼도록 권면한 것이다.
‘무송정가인撫松亭歌引’은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 오랑캐[夷狄
]의 침입으로 세상의 도가 피폐해졌다는 중국의 고사에 빗대었다.
일본의 침략과 그로 인한 유교적 기풍이 상실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이다. ‘여우과죽림사與友過竹林寺’ 등 기행시도 여러 수 있다.
서書의 ‘상노사기선생上蘆沙奇先生’은 스승인 기정진에게 보낸
편지이다. 학문적 성취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지도를 바라는 이다.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은 1905년경 최익현에게 보낸 서신
이다. 그의 학덕과 언행을 기리고 자신도 그와 뜻을 같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답노순오答盧順五’에서는 성리설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심경
心經의 심학도心學圖에는 본심이 왼쪽에 있고 양심은 오른쪽에
있다고 하는데, 양심은 곧 본심이므로 두 마음을 나누는 것은 반드시
정과 동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같이 두는 것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다.
‘답이선경答李宣景’과 ‘답하치구答河致九’ 등에서도 경서나 사서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잡저도 서신이 대부분이다. 이
도 주로 자신의 제자나 친구에게 언행을 바르게 할 것을 바라는
교훈적 내용이 많다.
해온이는 현와 선생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안타까움만 가득 했다. 우리
주변에서 쓰러져 가는 선비들의 흔적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비정신의 근본은 맑음에 있다. 결코 청빈한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니고 일생을
청렴 청빈 절제 검약의 정신으로 살았던 광주 선비들의 정신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온이는 이러한 현와 선생의 모습을 통해 광주정신이 선비정신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광주정신을 부르짖기보다는
우리의 뿌리를 오늘에 되살리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광주는 이게 부족하다는 것에 놀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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